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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Feb 03. 2024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감정탐색(2)

피해의식 너머, 상처가 회복되고 나면

피해의식과 관련된 감정작업 후 며칠간 몸살에 시달렸다. 감정작업을 여러 번 했던 터라 이제는 정리하고 통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그 상처가 이제 다 아물고 새살이 올라왔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마음이 해어지는 일이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많이 치유되었는가는 해진 마음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눈 돌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 빨리 거칠게 봉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피를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상처 입은 감정의 기억들. 두려움, 분노, 우울함, 열등감, 무기력, 억울함 등


이번에 반갑지 않은 여섯 개의 마음을 만나며 내가 주로 넘어지는 감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두려움, 분노, 억울함, 열등감, 우울함, 무기력으로 드러나는 피해의식두려움이 모든 감정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확실하고 모호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과도하게 방어하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여섯 개의 감정 중 첫 번째 작업 '두려움'을 시작하면서 어두움 숲 속 길을 뚫고 지나가고 싶어 졌다. 그 길을 지나 '무기력'에서 만난 문을 열고 싶었다. 그 문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여섯 개의 감정을 통합하여 통과해보고 싶었다.




<그 길에는 네가 있었지. 그 시작부터 말이야>, 2024-2-3


첫째, 두렵게 느껴지는 숲길을 지나가고 싶다. 가운데를 송곳으로 깊숙이 찌른 후 길을 내었다. 첫 번째 길이기에 가장 크게 구멍을 뚫었다. 두려운 숲, 어두운 하늘을 손으로 찢었다. 조금씩 천천히 구멍을 내며 들어갔다.


둘째, 들어가는 길에 더 힘을 내기 위해 분노의 화력을 이용했다. 분노는 에너지다. 인생의 고난에 맞불을 놓는 심정으로 불길을 뚫었다.


세 번째, 열등감이다. 화력의 힘을 받아서인지 열등감에 빠져들지 않았다. 종이를 계속 찢어 중심부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 번째, 우울감이다. 우울감은 감정의 실체를 알 수 없음에서 온다. 나는 우울 속에서 흔적을 찾으려 했고 지금은 길을 찾고 있다. 우울은 종이와 함께 잘려 나간다.


다섯 번째, 억울함이다. 상당 부분 타자로부터 전이되어 온 감정이었다. 사뿐히 넘어서고 싶은 감정이지만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찢기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걸 남겨서 또 어쩔 것인가. 지난 기억은 새로운 기억의 재료가 된다. 억울함도 찢었다.


여섯 번째, 무기력이다.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마음에 심정이 생각났다. 시원하게 구멍을 뚫었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나간다.


마지막, 처음 작업했던 '두려움'을 다시 만났다. 어둠 속에서 놀이를 했던 그날의 추억을 통과한다. 그 놀이 뒤에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까. 마지막 종이는 빈 종이로 남겨 두었다. 작업 맨 나중에 떠오르는 것을 그릴 계획이다.


찢은 종이를 합체하고 났더니 덤불을 헤치고 나가는 모양이 되었다. 덤불 속에는 날카로운 검은 가지뿐 아니라 푸르고 싱그러운 나뭇잎들도 있었다. 더 안쪽에는 꽃이 피어있기도 했다. 그리고 들어설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가 덤불 입구에 있었다.


덤불을 지나고 난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피해의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처가 치유되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상상하게 될까? 저 너머의 세상은 여전히 백지이다. 저 너머의 세상을 함부로 희망하지 않는다. 그 끝에 환희로 가득하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가는 한걸음 한걸음의 과정을 사랑할 것이다. 상처 입더라도 다시 문을 열 것이다.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회복해 가는 과정을 사랑할 것이다. 덤불을 지나는 과정에서 만난 새들과 꽃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씩씩하게 세상과 부딪히며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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