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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l 16. 2024

자기애, '너'를 통해 가능한 사랑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부터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흔해지기 시작했다. 공동체 속에서 착한 아이로 길러졌다는 반감 때문일까? 공공의 질서에 잘 적응하는 사람을 착한 아이라고 불렀고 모범생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 많은 착한 아이들은 공동체에서 겉도는 외로운 사람이 되어 버렸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잃어버렸다. 타자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착한 아이들은 반기를 든다. "이제 의무에 지쳤어. 이제부터 나는 나를 사랑할 거야." 타인을 향했던 그들의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이렇게 행복한 자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욕망을 자기애라고 부른다.    

   

우리는 모두 자기애적 경향이 있다.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려 한다. 그런데 그 방식에 있어 타자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을 통해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자기애가 강할수록 타자를 이용하려 한다. 사랑해야 할 '너'를 자기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기 십상이다.


병리적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기보다는 자신을 혐오하는 것에 가깝다. 자신의 참모습을 부정하고 겉으로 보이고 꾸며진 자신의 이미지만을 사랑한다.  진정한 자신을 소외한 채 이상화된 이미지에 집착한다. 착한 자신의 이미지, 멋있는 자신의 이미지, 유능한 자신의 이미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 가면 속에 숨겨진 자신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이 느껴야 할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이 대신 느끼도록 조종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기애에 특징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 신화 속 등장인물인 나르키소스(Narcissus)의 이름을 차용하여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르키소스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굶어 죽어버렸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신화와 이 신화를 소재로 한 명화를 통해 자기애(나르시시즘)를 더 이해해 볼 수 있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


니콜라 푸생 <에코와 나르키소스> 1628~1630년, 캔버스에 유채, 74X10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알게 되면 죽는다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나르키소스의 어머니 리리오페는 아들이 오래 살 수 있을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찾아가 묻는다. 어머니는  "그럴 것이오. 그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오."라는 답변을 받게 된다.     


이 운명을 반신반의 한채 시간은 흘러 나르키소스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외모를 남녀노소 칭송하고 열망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르키소스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나르키소스는 모든 구애에 냉담했으며 거절받은 이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구애를 일종의 공격으로 느끼기도 했다. 나르키소스는 누군가를 사랑하여 마음을 주는 것을 자신에 대한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며 이것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처럼 그가 살아 있는 한에서는 그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자기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도 알지 못한다.


요정들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나르키소스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 나르키소스에게 거절당한 무리 중 한 명이 신에게 요청한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요정들은 나르키소스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나르키소스의 겉모습에 끌렸을 뿐이다.      


신의 저주가 내려진 나르키소스는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물에 비친 모습이 자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강물에 비친 너무나 아름다운 누군가의 모습에 반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물이 일렁거려 모습이 흐트러지고 멀리 물러서면 보이지 않아 애가 탄다. 결국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바로 나야. 이제야 알겠어. 나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거야”.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자각했지만 끝내 자신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결국 강가에서 말라죽고 만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4~1596년, 캔버스에 유채, 110 x 92cm, 로마, 바르베리니 궁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다가 죽은 어리석은 자이기만 할까? 푸생(1594~1665)이 그린 <에코와 나르키소스> 그림 속에 나리키소스는 다른 이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간 안타까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카라바조(1571~1610)의 나르키소스는 다르다. 카나라바조의 <나르키소스>는 자기애에 빠진 자아도취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감상자의 시선은 밝은 빛이 떨어진 소년의 얼굴, 몸을 낮춘 그의 몸에 집중된다. 그리고 조금씩 그가 깊숙이 바라보고 있는 물속으로 마음이 이동된다. 강물은 마치 진실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소년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카라바조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스토리의 재현이 아닌 그만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독백하는 배우의 모습처럼 연출한 것이다.


카라바조는 매너리즘 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천재 화가이자 각종 범죄에 연루되다가 급기야 살인죄로 도망을 다닌 범죄자였으며, 성스러운 성서화에 저작거리 사람들을 모델로 등장시킨 반항아이기도 했다. 카라바조는 죽기 전까지 자기 안의 있는 천부적 예술 감각과 광기, 성스러움과 세속, 빛과 어둠사이에서 갈등한 예술가이다.


<나르키소스>가 카라바지오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인간의 명암, 삶의 명암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에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이 명암대비를 통해 더 극명해졌지만 분열되거나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을 통해 밝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어두운 강물이 있기에 소년의 존재가 더 아름답게 부각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라바조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얼굴을 사랑한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만난 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어둠이 있어야지만 볼 있는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순간, 바로 자기 성찰(Reflection)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나르키소스는 운명대로 자신을 알게 되 죽고 만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길래 목숨과 맞바꾸는 것일까? 나를 안다는 것은 보이는 자신과 보이지 않는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겉모습과 속모습, 밝은 면과 어둠의 이중성에 대해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타자가 없다면 자신을 인식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양육자)의 돌봄으로 자라났으며 나를 향한 어머니의 말과 비언어적 시선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절대적 권력이 있는 타자, 내가 사랑하며 믿고 의지하는 타자가 나를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따라 나란 사람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나 스스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어머니와 혹은 의미 있는 타자에게 비친 모습을 통해 나를 인식하게 된다.


 "착하게 굴어야 해."라는 자기 반영만 받은 사람은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경우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울면 안 돼, 강해야 해"라는 자기 반영을 받은 사람이라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싶을 것이다. "너는 까다로워서 문제야."라는 자기 반영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불안해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생각지 않은 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적절하게 느끼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만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해 주고 반영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나르키소스에게는 타자가 없었다. 그는 테레시아스의 예언처럼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모른 채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에 자신에게 향한 구애를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자신을 반영해 주는 타자는 나를 비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타자는 나의 모습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말과 시선으로 내 모습을 돌려준다. 그렇게 되돌아온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이기적이어도 괜찮아. 약해도 괜찮아. 까다로워도 괜찮아. 그것들 모두 나의 모습이야. 타자는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고 그것은 다시 내게 내면화된다. 나를 아름답게 비추는 거울, 그것은 나의 좋은 점, 사람들이 좋아하는 면을 비추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 못하는 나의 어둠까지 구석구석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어둠을 알지라도 그것을 자기 자신과 쉽사리 통합되지 않는다. 분열되고 갈라지고 찢어진다. 마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 죽음은 파멸이 아니다. 파괴되고 생성되는 과정이다. 자기로 가득 찬 세상이 파괴되는 과정이며 물과 하나 되어 새로이 생성되는 과정이다. 결국 나르키소스는 수선화(Narcissus)로 부활했으니 말이다.


수선화는 이제 강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아닌 자신을 비춘 강물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인 강물을 알아본다면 말이다. 자기를 알고 싶다면 타자를 만나야 한다. 나를 비춰줄 '너'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참고문헌]               

1. 오비디우스,『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천병희(역), 도서출판 숲, 2017

2. 김상근,『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평단문화사, 2005

3. 장 다비드 나지오,『정신분석의 근본 개념 7가지』, 표원경(역), 한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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