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사랑 이야기
"운명적 사랑을 만난 공주는 저주를 풀고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게 살았대"는 공주 이야기의 전형이다. 요즘은 그 이야기들이 좀 변형되어 공주의 역할이 좀 더 능동적으로 변화되는 추세이지만 그 끝이 행복한 결말인 것은 대동소이하다. 고난을 극복하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을 도와주는 주변 인물,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언제고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그 행복이 유지될 것이라는 안도감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우리에게 달콤한 안식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인 진통제일 뿐이다. 흔한 공주의 이야기는 허황되고 허무하다. 우리의 삶은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역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공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의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공주 스토리와는 다르다. 운명적 사랑을 만났지만 그 운명적 사랑이 공주를 배신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영웅 중 한 명인 아테네의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에 있는 미궁 속에 들어가 사람을 잡아먹는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아테네 시민을 구하는 인물이다. 크레타 섬에는 반은 인간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르스가 살고 있었다. 크레타 왕은 미노타우르스가 왕비의 자식이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절대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어 가두게 된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를 위해 아테네의 사람들을 제물로 제공한다. 테세우스는 매해 사람들이 제물로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궁 속으로 자처하여 들어간다.
크레타 섬의 공주인 아리아드네는 그런 테세우스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아르아드네는 사랑하는 테세우스를 돕기 위해 그가 미궁 속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미궁 속에서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왕의 명을 그의 딸이 어긴 것이다. 그리고 테세우스와 함께 크레타 섬을 빠져나온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뿐 아니라 가족 그리고 살던 고향까지 등지고 만다. 크레타를 벗아 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일행은 낙소스섬에 정박하여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테세우스는 잠든 아리아드네를 홀로 남기고 섬을 떠난다.
운명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에블리 드 모건,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1877
에블리 드 모건이 그린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한 이에게 버림 당한 여인을 참담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 테세우스와 그가 타고 있는 배는 사라진 상태이며 그녀에게는 옷 한 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신발도 잃은 채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듯 망연자실해 있다. 아르아드네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아버지를 배신했으며 살던 고향도 등졌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사랑을 쫒았지만 그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믿음에 배반을 당한 자의 모습은 흔히 이런 모습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내어 준 후 헐벗은 모습, 마음이 가난해진 모습말이다. 운명을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다. 고달픈 운명에 지친 자의 모습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아리아드네>, 1898, 캔버스에 오일 91.12 x 151.13 cm
반면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매혹적으로 그렸다. 아리아드네는 보라색 깔개 위에 붉은 옷을 입고 몸을 비틀며 마치 유혹하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 멀리 테세우스의 배가 떠나고 있지만 잠든 그녀의 주변에는 표범 두 마리가 그녀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표범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한다. 디오니소스는 슬퍼하는 아리아드네를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운명의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새로운 운명의 상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아리아네스 같이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배신을 당하면 분노, 증오, 복수심, 수치심, 우울함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이는 배신한 상대를 증오하는데 자신의 삶을 보낼 것이다. 어떤 이는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다 못해 복수를 감행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그런 일을 겪은 자신을 책망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또다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은둔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상처가 욱신 거려 디오니소스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더라도 다시 찾아온 사랑을 알아보지 못할 공산이 크다.
아리아드네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슬픔을 극복했을까?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아리아드네는 고통을 긍정하기라도 한 것일까?
운명에 대한 사랑
아리아드네는 운명에 빠진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선택하고 책임지는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사랑의 감정으로 심장이 뛰었으며 그 심장이 부르는 곳에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이를 도왔으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원하는 것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녀는 낙소스 섬에 남겨졌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그녀를 위해 뛰고 있다. 홀로 남겨진 그녀의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가더라도 그녀는 그 또한 사랑의 흔적으로 받아들였으리라. 그리고 디오니소스(표범)의 위로를 받으며 그녀는 점차 회복되고 있다. 그녀의 심장이 디오니소스의 따뜻함을 느끼고, 위로에 고마워하며 다시 뛰고 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운명은 내게 던져지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쁨이건 슬픔이건 행복이건 고통이던, 행운이던 불운이던, 수용함이던 거절함이던, 다정함이던 까칠함이든 간에 주는 것은 모두 사랑하는 것이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보다 능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다. 내게 온 것을 그저 견디고 참는 것과는 다르다. 내게 찾아온 것을 내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아끼고 돌보고 꾸짖고 반성하며 나를 키우는 힘이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를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의 인연의 매임도 미래에 희망에 기댐도 아니다. 그저 내게 있는 지금을, 내 몸속에서 팔딱거리는 심장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을 사랑할 수 있는 자, 내게 온 행복과 고통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평온히 잠이 들 수 있다. 행복에 쉽게 취하지 않으며 고통에 지레 겁먹지 않는다. 운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