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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Aug 08. 2024

용서, 처절한 성찰 끝에야 오는 것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성경 속의 다윗과 골리앗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선의 승리 또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반전의 스토리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블라셋과 이스라엘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중 블라셋에서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와 일대일로 맞짱을 뜨자며 도발한다. 구약성경에는 골리앗이 오천 세겔(약 57kg) 짜리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창날은 육백 세겔(7kg) 정도 나가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골리앗은 60킬로에 가까운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몸을 놀릴 수 있는 체력과 전투 기술을 가진 장수였다.


겁을 먹은 이스라엘군은 사십여 일간 골리앗을 상대도 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던 중 양치기 소년 다윗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골리앗이 겁먹은 이스라엘 군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다윗은 그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골리앗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다윗은 잘못된 것은 묵인할 수 없는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윗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평소 가지고 다니던 막대기와 자갈돌 다섯 개 그리고 돌팔매 끈을 가지고 골리앗과 결투한다. 다윗은 돌을 꺼내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자 골리앗이 쓰러졌고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목을 잘라버린다. 이렇게 이스라엘군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후대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바로크 시대 화가들의 다윗과 골리앗


(좌)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 <골리앗을 이긴 다윗>16세기, 캔버스에 오일, 루브르박물관, 파리

(중) 귀도 레니 <골리앗의 머리를 잡은 다윗>, 17세기, 237x137 cm, 캔버스에 오일, 루브르박물관, 파리

(우) 구에르치노 <다윗과 골리앗>1650년, 120X102cm, 캔버스에 오일, 트라팔가 미술관, 런던



다윗이 골리앗을 참수하는 장면은 많은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1580~1622)의 그림에서는  골리앗을 이긴 다윗은 여인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다윗의 표정은 용맹스러우면서도 자만하지 않지만 여인이 탬버린을 흔들면서 축제의 기분을 자아내고 있다.  표정을 부드러워 보이지만 계속 칼을 차고 다니며 긴장을 놓지 않고 있다.


귀도 레니(1575~1642)의 작품 속 다윗은 잔뜩 치장을 하고 있다. 몸은 모피를 두르고 있으며 머리에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다. 다윗은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리를 꼰 채로 무장해제된 상태이다. 그리고 죽은 골리앗 얼굴을 잘 보이도록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갈돌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골리앗의 이마를 감상자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장수와 같다.


오른쪽에 구에르치노(1591~1666.)의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자신이 골리앗을 죽인 것인 신의 의한 것이라는 듯, 신에 도움이라는 듯 겸손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다윗의 신앙심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세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다윗은 선한 자이며 영웅이다. 반면 골리앗은 악당이며 패자이다. 목이 잘린 악당은 인형처럼 표정이 없으며 위협적이지도 않다. 이제 모든 갈등은 끝이 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일만 남겨진 상황이다.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


카라바조 <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10, 캔버스에 오일, 125x101 cm, 보르게세 갤러리, 이탈리아


카라바조(1571~1610)가 그린 다윗과 골리앗은 느낌이 다르다. 다윗은 모자도 투구도 없는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한 손에는 참수당한 골리앗의 머리를 공중에 들어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골리앗의 목을 자른 칼을 들고 있다. 여기서 다윗은 목이 잘린 골리앗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골리앗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반쯤 뜨고 있다.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은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느껴진다. 잘린 목에서는 피가 주룩 흐르면서 사건이 끝났음을 보여주지만 골리앗의 고통은 아직 진행 중인 것만 같다. 골리앗의 잘린 목에서는 피가 주룩 흐르면서 사건이 끝났음을 보여주지만 골리앗의 고통은 계속 진행 중인 것 같다.


왜 골리앗은 눈을 감지 못하고 있으며 어째서 다윗은 죽은 골리앗을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이 작품의 등장하는 다윗과 골리앗은 모두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이중자화상인 것이다. 다윗은 카라바조의 젊은 시절을, 골리앗은 말년의 얼굴로 그려 넣었다. 젊은 시절의 카라바조가 말년의 카라바조의 목을 베어 응징한 것이다.


카라바조는 매우 잘 나가는 화가였다. 그는 '어둠의 방식'으로 그리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의 기법을 창시했으며 이 화풍은 17세기의 주류가 되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어둠 속에서 조명을 비춘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낸다. 단순히 빛으로 강조한 것이 아니라 어두운 것은 더 어둡게 숨기고 드러낼 것은 더 밝게 부각해 인간 내면의 이중적인 면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서 속에 등장하는 성인이었지만 그 성인을 그릴 때는 저작거리의 사람들이나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사용하기도 했다. 카라바조의 새로운 시도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다수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카라바조는 예술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사생활에서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호전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툼이 많았으며, 시비 끝에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는 로마를 떠났고 도주하는 삶을 살게 된다. 로마에서 여전히 카라바조의 재능을 아끼던 곤자가 추기경은 카라바조의 사면을 위해 노력했다. 이 그림은 자신의 구명을 위해 위해 노력하는 곤자가 추기경에게 보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바조는 독단적이었고 공격적이었다. 삶에서도 그랬고 예술에서도 그랬다. 그는 자기 이전 시대의 화가를 혹평했으며 그들의 성과를 부정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살인을 하고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반성했던 것 같다. 지나친 자부심으로 인해 오만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오만했던 말년의 카라바조를 순수했던 유년의 카라바조가 응징한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우리 내면의 다윗과 골리앗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며 심장이 서늘해지거나 동시에 측은해 보인다면 내 안의 다윗과 골리앗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도 단죄하고 싶은 골리앗이 있다. 내 뜻대로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함, 인간관계를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착각,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를 무시했던 어리석음, 이 것들은 "나만 옳아"라는 독선에 빠진 결과이다. 지금의 '너와 나'뿐 아니라 지금의 '너와 나'를 이르게한 수많은 과거의 역사를 무시한 편견이다. 그 완고했던 교만함을 잡아 족치고 싶다. 목을 비틀어서라도 끝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 또한 내 안에 있는 '나'  아니던가. 어디선가 만날 수 있는 '너' 아니던가.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던가. 밝음과 어둠 속에서 갈등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던가. 그래서 골리앗을 보는 다윗의 눈이 그리 측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너'의 죄를 벌하면서도 '너'를 동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카라바조 그림의 위대함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이중적이고 모순되고 대립적인 면을 혐오하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유약함으로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카라바조는 골리앗이 목이 잘리고 나서도 끝내 눈을 감지 못한 것으로 표현했다. 어린 소년에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허망함을 고약하게 표현했다. 


골리앗이 겪고 있는 끝나지 않는 고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허무과 죽음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느끼게 한다. 자기반성을 해야만 과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제야 새로운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고, 용서받고 사랑받는 일은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성찰 끝에서야 찾아오는 고된 것임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1. 김상근,『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평단문화사, 2005

2. 이은기, "카라바조의 자화상, 그 해석과 문제점",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9집, 1997

3. 한국천주교주교회 공동번역성서 bible.cb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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