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흔한 타로점도 본일이 없고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도 작명소에 들르지 않았다. 일이 잘 안풀릴때는 상황을 돌파해 보려고 다른 시도를 했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렸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구하려고 애썼다. 무언가 하다 보면 원하는 것이 내 것이 되어 있었다. 내 것이 되지 않더라도 애쓴 것은 포기가 가능했다. 그랬기에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말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다.
자만했다. 운명에게 길을 묻고 싶은 순간이 운명처럼 찾아왔다. 내가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은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안온했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과거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철학을 배우면서 그동안 선이라 믿었던 것, 사랑이라 믿었던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살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가 덮쳤다. 이미 위선의 껍질은 너덜하게 벗겨져가고 있었지만 이 껍데기를 모두 벗겨낸 채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울고 불며 처절히 운명을 찾았다. 껍데기를 벗고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위선을 벗고 진실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허영의 옷을 맨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나의 운명인가? 그 가혹하고 혹독한 길이 내 운명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이것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이미 정해진 길이라고 한다면, 나는 모든 고초를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운명이니까, 나는 그렇게 될 팔자니까 말이다. 운명이 내 선택을 정당화 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선택의 책임을 운명에게 전가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책임이 아닌 운명의 책임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운명에 순응하며 살았던 사람인지 자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무의식 중에는 매우 운명론적인 사람이었다.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내가 알고 있는 삶의 질서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큰 저항을 느꼈던 것이다.
운명은 공포감을 조성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샬롯의 여인>, 1888, 캔버스에 유채, 153 x 200 cm, 테이트브리튼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가 그린 <샬롯의 여인>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1890-1892)의 시 <살롯의 여인>의 내용을 그림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테니슨(1890-1892)의 시 <살롯의 여인>에는 샬롯마을의 탑에 살고 있는 여인이 나온다. 여인은 바깥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오직 거울에 비친 마을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여인은 거울의 비친 마을의 모습을 수를 놓아 태피스트리를 만든다. 일을 하던 여인은 거울을 통해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여인은 그를 거울이 아닌 실물로 보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실제 세상을 보게 되면 죽는다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성을 나온다. 배를 타고 그의 얼굴을 보러 간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도 전에 그녀는 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얼어 죽고 만다. 그녀는 주검이 된 채 남자와 마주하게 되지만 남자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를 찾아 떠났지만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워터하우스의 그림 <샬롯의 여인>은 성에 나온 여인이 사랑을 찾아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사랑을 향해하는 여인의 모습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여인의 뒤편의 숲은 어둡고 음침하며 그녀가 건너는 강은 스산하다. 뱃머리에 달린 램프의 불은 빛을 잃어가고 있으며, 램프를 대신할 촛불 3개 중 두 개는 이미 꺼져있다. 배 위에 기댄 여인의 얼굴은 넋이 빠져있는 듯하다. 정신이 어딘가에 홀린 듯하다. 마치 어딘가로 끌려들어 가는 것만 같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그곳으로, 자신을 향하게 하는 곳으로 속절없이 끌려들어 가는 것 같다. 여인은 사랑을 향해 가지만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운명을 거부한다는 것은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운명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운명을 거스른 자에게 향하는 소위 '저주'때문이다. 정해진 길을 거부하려 할 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거대한 운명과 같은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순응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인은 어떻게 이런 목숨을 건 여정을 결단한 것일까?
운명을 의심하는 순간 정신은 각성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랜슬롯을 찾아 나서는 샬롯의 여인>, 1894, 캔버스에 유채, 142.2 x 86.3 cm, 리즈 미술관
샬롯의 여인이 강을 건너기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랜슬롯을 찾아 나서는 샬롯의 여인> 속에 담겨 있다. 그림 속의 그녀는 손에는 실이 감긴 북이 들려 있다. 아마도 베틀을 짜다가 몸을 일으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몸의 쏠림과 부리부리한 눈은 이미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하던 일을 중도에 멈추고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는 거울 속에 있다. 여인이 베틀을 짜는 중 기사 한 명이 거울 속에 비친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투구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여인은 남자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아마도 남자가 행진하며 부르는 생생한 노랫소리와 말 발자국 소리에 그녀의 마음은 이미 흔들렸으리라. 샬롯의 여인은 남자가 지나가는 장면을 거울이 아닌 창문을 통해 본다. 금기를 어긴 그 순간 거울은 깨져 버린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환영이 아닌 실제의 세상을 보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만나 보겠다는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다. 여인이 베틀 짜는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녀의 역할을 상징하는 실이 그녀의 다리를 칭칭 감고 방해한다. 정신적 각성의 순간은 아름답게 찾아오지 않는다. 발작이 일어나듯 급작스레 찾아온다. 정신이 이해하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몸이 나아가려 하지만 나아갈 수 없다. 기존의 역할이, 강력한 금기가 공포감을 조성하며 여전히 여인을 붙잡으려 한다. 그럼에도 각성된 정신은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나아가려는 정신, 붙잡으려는 관습이 갈등을 일으킨다. 운명에 순응하는 자아와 거부하려는 자아의 대결이 팽팽해진다.
운명에 순응은 환멸이 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샬롯의 여인은 '나는 그림자에 반쯤은 질려버렸다'라고 말했다>, 1915, 캔버스에 유채, 100.3 x 73.7 cm, 온타리오 미술관
테니슨의 시는 시간순서로 되어 있지만 워터하우스는 역순으로 그림을 그렸다. <샬롯의 여인>을 그린 후 6년 뒤에 <랜슬롯을 찾아 나서는 샬롯의 여인>을 그렸고 그로부터 11년 후에 <샬롯의 여인은 '나는 그림자에 반쯤은 질려버렸다'라고 말했다>를 그리게 된다. 이 이야기의 도입부를 그린 <샬롯의 여인은 '나는 그림자에 반쯤은 질려버렸다'라고 말했다> 속 여인의 얼굴은 지루함과 권태로움으로 가득하다.
여인이 살고 있는 성은 훈육된 공간이다. 특히 당시 빅토리아시대의 상황에서 보았을 때 성은 여성에게 욕망의 억압을 상징힌다. 여인은 성에 갇힌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인 태피스트리를 만들어야만 한다. 세상도 자신의 눈으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거울에 반사된 것만 보아야 한다. 그녀가 직접 세상을 본다면 죽게 된다는 저주까지 있다. 여인은 두려움이라는 성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불안과 우울이 찾아오는 것은 자아가 기존의 운명을 거부하고 있다는 일종의 신호이다. 다른 운명을 원한다는 요구이다. 밖에서 흥어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잘 귀울여 보자. 내 곁을 누가 지나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보자. 새로운 마주침을 만들지 않는다면 답답한 성의 탑에서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 지긋지긋한 환멸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죽음이 찾아와서야 진짜 세상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살아야 한다.매혹적인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 때 몸은 일으켜진다. 그렇게 거울속 세상은 깨지고 만다.
마주침은 운명은 생성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가들은 욕망을 찾아 떠난 <샬롯의 여인> 이야기의 결말을 비극으로 표현했다. 욕망 때문에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욕망을 쫒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며 겁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샬롯의 여인> 이야기는 공포물이 아니다. 그녀는 운명을 거부하여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운명을 능동적으로 선택했다. 운명은 그녀에게 두 가지를 계시를 내렸다. 하나는 가짜 세상 속에서 진실을 모른채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 계시와 또 다른 하나는 진짜 세상을 보면 죽게 된다는 계시였다. 그녀는 두 번째 운명을 선택했다.
그녀는 진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정신이 빠진 채로 이 강에 흘러들어 온 것이 아니다. 워터하우스의 그림 <샬롯의 여인>을 다시 보자. 여인은 자신이 만든 태피스트리로 배 안을 채우고, 뱃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은 하는 누구인지 밝히며 항해를 한다. 그것도 사랑을 향한 항해를 한다.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얼굴은 슬픔이나 두려움에 압도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곧 죽을지도 모를 자신의 불행을 주시하며 사랑을 향해 간다.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 강물은 그런 그녀를 보다 멀리 데려다 준다.
운명은 있다. 운명은 결정된 하나가 아니다. 운명은 무한히 많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주침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운명이 만들어진다. 이토록 많은 운명이 있음에도 과감히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책임때문이다. 선택 이후 닥칠 후폭풍에 대한 책임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내가 오늘 하는 선택이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안다.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할 때마다 생각하지 못한 다른 길이 나고 있음을 안다. 운명을 믿는 사람은 운명에 집착하지 않는다. 운명을 생성해간다. 그렇게 생성된 운명은 나를 보다 넓은 세상으로 데려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