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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21. 2024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면

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

비욘드 더 스크림


해골같은 몰골이 있는 <절규>를 생각하며 전시장에 갔다. 전시장에는 붉고 강한 이미지의 그림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단조로운 색조의 판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같은 주제를 판화로 재작업 한 작품들이 많았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슬픔에 압도된 작품들이 많을 거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여러 번 재 작업한 판화 작업에는 불안과 슬픔보다는 묘한 리듬감이 느껴졌다. 판화를 찍을 때마다 색을 바꿔 찍기도 하고 1-2mm씩 종이 위치를 어긋나게 찍은 것들도 재미있어 보였다. 


이별, 질투, 상실의 감정을 다룸에 있어서도 슬픔에 잠식되었다기보다는 슬픔을 다양한 감각으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슬픔을 수많은 종이에 판화를 찍어 냈을 거라고 생각하니 뭉크의 작업이 감정의 표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질긴 집요함이 느껴졌다. 보다 정확한 감정의 결을 찾고자 하는, 제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제대로 알고자 하는 집요한 힘의 의지 같은것 말이다. 





슬픔에 가려진 기쁨


뭉크는 슬픔을 그린 작가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 누나, 동생을 병으로 잃었고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빠져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뭉크도 병약하여 학교에 잘 가지 못했고 늘 죽음의 냄새와 함께 지냈다고 유년기를 회고했다. 뭉크는 사랑에도 여러 번 실패했다. 아니다. 사랑에 실패라는 표현은 어울리지는 않는다. 뭉크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의 감정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헤어진 연인을 마음속에서는 떠나보내지 못했고 상실의 감정을 가슴에 담고 슬퍼했다. 그는 상실의 슬픔을 직면하려 했다. 절박하게 발버둥 쳤다. 


내가 아는 뭉크는 슬프지 않기 위해 슬픔과 대적한 이다. 그러나 뭉크의 슬픔이 그 반대편에 있는 기쁨에서 시작된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브런치에 썼던 뭉크 시리즈 또한 불안에 직면했던 예술가라는 점을 주제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의 슬픔 이면의 있었던 기쁨은 보지 못했다. 실제 그의 작품은 우울, 불안, 질투, 두려움 등의 감정이 두드러진다. 슬픔에 주의를 집중하느라 기쁨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맹점처럼 말이다. 


우리 눈에는 맹점(blind spot)이라는 것이 있다. 맹점은 눈을 통하는 시신경의 바로 앞부분에 있는 것으로 시세포가 없어 물체가 보이지 않는 망막의 한 부분이다. 맹점이 있음에도 우리 눈앞의 세상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뇌가 맹점을 잘 땜질하여 매끈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의 편집이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에도 맹점이 있다.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순이나 틈을 말한다. 지각의 한계, 인식의 한계, 지식의 한계, 경험의 한계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은 우리 뇌가 해석하여 채운다. 뭉크의 그림은 우울해, 뭉크의 그림은 슬픔이야, 뭉크는 인간의 어둠에 천착했지 같은 생각들로 부족한 조각을 채워버릴 수 있다. 


맹점을 극복하려면, 있는 것을 그대로 보려면, 보이는 슬픔 너머를 보려면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글자 사이에 맥락이 있듯이 그림 사이에도 흐름이 있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표현의 변화가 있다. 이 변화의 흐름과 차이를 읽어내려고 하면 한 사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겪은 일들도 마찬가지다.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사실과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지각하려 애를 쓸 때 그제야 어설프게 무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틈이 생긴다. 그 틈을 계속 벌리려 할 때 우리는 보이는 것 너머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뭉크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기쁨이 남긴 흔적이다. 기쁨이 떠나며 남긴 흔적이다. 그 기쁨의 흔적을 일깨우고 되살릴 때 다시 기쁨을 찾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해


뭉크 <파도속의 연인들>


바다의 물결 위에 여자가 유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바다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여자의 표정은 두려움이 없었다. 이 물살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아니, 감당하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을 뺀 채, 물결과 합을 맞추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여자의 얼굴에 홀려 있는 내게 친구는 그림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두 사람이야"


이제야 이 표정이 이해가 된다. 여인의 담대한 표정은 '너'가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에서 둘로 확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완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록 맹점이 있지만 '너'는 '나'의 눈이 되고 '나'또한 '너'의 눈이 되어 줄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더 자세히, 제대로 보게 할 것이다. 슬픔 너머에 있는 세상까지.






Exhibition Details

에드바르 뭉크 : 비욘드 더 스크림

2024. 05. 22 ~ 2024. 09. 19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서울 서초구)

www.munch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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