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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Aug 25. 2023

뭉크(3) 그러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린다.

예술가가 고난을 대하는 법

내 고난은 나 자신과 예술의 일부이다. 그들을 나와 구분할 수 없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나의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고통들을 간직하고 싶다.
-뭉크-



고난의 변주들


예술가에게 사랑과 고난은 모두 창작의 재료가 됩니다. 특히 고난은 위험한 창작의 재료입니다.  고난은 폭발적 에너지를 지닌 창작의 에너지가 됩니다. 상처받은 고통, 홀로 된 외로움, 모호한 불안감 등은 삶을 슬픔으로 몰아가는 무거운 감정이지만 이 무거움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둠을 직면할 때입니다. 어둠이 짙고 무거울수록, 끈질기고 집요할수록 그 힘은 더욱 강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뭉크는 환청과 망상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겪은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려고 하였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출구인 것처럼 말죠.



뭉크 <절규> 1893년, 마분지에 유화, 템페라, 파스텔, 91X73.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의 대표작 <절규>를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뭉크의 심리적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단순히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것과 같은 느낌을 떠나 그의 신체 감각이 외부 세계를 공포 자체를 감각해 버립니다. 작가가 왜 이런 기괴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뭉크가 남긴 메모를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막 석양 무렵이었는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란 피오르드와 마을 위로 불과 피의 혀가 너울거리며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먼저 가 버리고 홀로 남아 있었다.
그때 무엇인지도 모르는 공포에 떨면서, 자연의 큰 절규를 들었다.   
- 뭉크의 일기 중


뭉크는 하늘이 피로 물들고 마을이 불타면서 자연이 절규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에 대한 체험을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그림 중앙에 있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메모를 보면 실제는 자연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이에 대한 감정의 표현을 그린 것이지요. 뭉크의 심리적 상태는 이 세계가, 심지어 자연조차 자신을 안아주지 못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뭉크 <폭풍우 치는 밤>, 1893, 유화, 91.5 X 131cm


<폭풍우 치는 밤>에서도 양속으로 귀를 틀어막고 서 있는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절망 앞에서 여자들이 귀를 막고 서 있고 흰색 옷을 입은 여인만이 무리와 떨어진 채 홀로 있습니다. 폭풍이 치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히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지만 귀를 틀어막으며 불안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림 앞쪽은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림 뒤편에는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폭풍우에도 끄덕 없을 정도로 안전해 보이는 집이지만 사람들은 안전한 집을 뒤로 강 앞에 나와 있습니다. 흰옷을 입은 여인은 안전한 집을 떠나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습니다.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정체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는 신비로움도 듭니다.


<풍풍우 치는 밤>의 이 장면은 <절규>에서 그 표현이 더욱 극렬하게 나타났으며 <카를 요한의 거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을 주제로 한 다른 그림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카를 요한의 저녁>, 1892년, 캔버스에 유채, 84.5X121cm, 베르겐, 라스무스 마이어 컬렉션


<카를 요한의 저녁>에서는 군중의 무리들이 영혼이 빈 것 같은 공허한 얼굴을 하며 길을 걷고 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군중들이 앞으로 쏟아지듯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얼 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옷을 잘 차려입은 중산층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만 보여줄 뿐이지요. 그러한 군중들 옆에 한 남자가 반대편으로 걷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군중들을 뒤로 한채 홀로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등을 돌린 남자에 대해서는 뭉크의 일기의 한 부분을 보며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저녁 빛에 창백하게 물들 얼굴들. 그는 다른 생각에 몰두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멀리 보이는 창가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하려고 한다. 다시 한 무리의 보행자들이 그의 곁을 지나친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서리를 치며 식은땀을 쏟는다.
- 뭉크의 일기 중



<불안>, 1894년, 94cm X 73cm   / <절망>1892년, 캔버스에 유채, 92X67cm


<카를 요한의 저녁>의 군중과 등을 돌린 남자의 모습은 <절규>를 변형한 <불안>, <절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새빨간 구름은 <절규>와 유사합니다. 항구를 뒤로 한채 다리 위를 걷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카를 요한 저녁>에 있는 그들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하나같이 마음속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걸까요? 무엇을 향해 가는 것일까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이들의 모습은 이러한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합니다.


<절망>에서 한 남자는 다리 아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무리와 떨어져 나와 홀로 있습니다. <카를 요한의 거리>에서 홀로 걷는 등을 돌린 남자와도 닮아 보입니다.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것일까요? 작품 제목처럼 기대가 사라진 '절망'을 느끼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일까요?



고통을 회피한 얼굴 vs 고통을 마주한 얼굴


뭉크 예술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불안'을 그린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배경입니다. 모두 압도되는 거대한 환경이 지배합니다. 폭풍우가 치거나, 하늘이 큰 재해로 뒤덮여 있거나, 칠흑 같은 어두운 밤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세상의 질서, 규범, 관습, 제도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법과 질서, 사회의 규범과 제약이 자연이라는 상징물이 되어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지요.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됩니다. 무리를 진 사람과 홀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리를 진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공허하고, 홀로 있는 사람들은 한없이 우울합니다. 이들 모두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그 질문을 회피한 이는 가면을 쓴 것과 같은 공허한 얼굴을 하게 되며, 그 질문을 고민하는 자의 얼굴에는 어두움이 들어 있습니다. 삶의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에게는 공허함이, 삶의 고통을 마주한 사람에게는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조차 긍정하려 한 예술가의 삶

뭉크 <니체의 초상>, 스톡홀름 스톡홀름 틸스카 갤러리 소장


같은 다리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니체의 초상>입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입니다. 니체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알 만큼 이 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신에게 찾았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이유마저 신에게서 물었으며, 현재의 불행을 신을 통한 사후세계에서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과거의 그러한 신에 대한 믿음은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우린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주인'의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까지도 받아들이며, 자신의 운명을 쥔 채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니체는 고통을 긍정했습니다. 뭉크역시 이러한 니체의 철학서를 탐독했고 그의 사상을 존중했습니다. <니체의 초상>은 니체 애호가였던 독일의 사업가 에르네스트 티엘의 요받고 니체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게 됩니다. <니체의 초상>은 <불안>, <절망>, <절규>와 같은 배경인 오슬로 피오르에 인접한 에케베르그 언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하늘은 붉은색이 아닌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의 얼굴은 사색에 잠긴듯 진지보입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더 이상 불안하지도, 절망하지도, 절규하지도 않는 모습입니다. 뭉크가 그림을 그리며 니체에게 자신을 투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희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니체처럼 고통을 긍정하기를, 고난의 운명을 손에 쥔 채 살아가기를 말입니다.






예술가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우리의 삶이 예술이 되기를


예술가는 불안한 감정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들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합니다. 뭉크 우울, 불안, 환청, 망상 등을 경험하면서 입원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뭉크는 자신의 증상을 예술의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아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와 대면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고난이 있는 현실의 삶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경험하고 본 것을 그립니다. 불안, 절망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가진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태워버릴 각오로 그립니다. 그렇게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예술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뭉크의 <절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술작품에 감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술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도 뭉크와 같은 정서가 있습니다. 내 안의 웅크려 있던 불안, 절망, 고독과 같은 힘든 마음이 뭉크의 작품을 만나면서 분출되어 나오는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또한 예술작품 속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뭉크의 그림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와 같은 물음을 잊지 않게 하죠. 내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술가는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고난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예술을 만나고,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모습이 닮고 싶어 지는 것이지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더라도 예술가처럼 삶의 고난을 대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삶의 고난이 왔를때, 인간답게 아파하고, 예술처럼 우아하게 만들어 나가기를, 그렇게 저마다의 삶이 예술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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