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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해설 수업 후기 (4)

by 정희주

습관기억과 순수기억


베르그손은 인간의 기억은 순수기억과 습관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순수기억은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을 사는 대신 꿈꾸고"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습관 기억은 "의식적 자동인형으로서 자극을 적합한 반응으로 연장하는 유용한 습관의 경향에 따르는" 상태이다. 순수기억은 차이와 개별성은 보지만 공통적인 것은 보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차이성만 볼뿐 유사성이 잘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습관 기억은 습관에 끌리기에 한 상황이 이전 상황과 실질적으로 닮은 측면만을 찾아낸다고 한다. 차이보다도 공통성의 감각에 예민하다.


수업에서는 이러한 순수기억과 습관기억의 차이를 예술가와 사업가에 비유했다. 예술가들은 독특함과 차이에 예민하여 자기만의 끊임없는 상상을 해대는 덕에 비상식적이게 되기도 하며, 사업가들은 유사성에 능숙하여 자기만의 프레임으로 대상을 끊임없이 판단하게 되어 개별적인 것을 잘 못 보게 된다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정상적인 삶에서는 순수기억과 습관기억이 내밀하게 상호 침투하고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원래의 순수성에서 뭔가를 포기하게 된다."라고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순수기억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모든 것이 차이로 보이고 그 차이가 크면 매우 피로함을 느낀다. 흔히 말해서 예민한 사람이고, 요즘 유행하는 심리학 개념으로 분류하자면 HSP(Highly Sensitive Person)에 가깝다. 어떤 자극은 폭포수처럼 내려와 압도되고, 많은 자극이 불편해서 감각을 느끼지 않기 위해 차단해 버리기도 한다.


순수기억과 습관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시행착오를 반복했을까? 양 극단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야 할까? 다시 한번 기억 속으로 거슬러 가본다.


스크린샷 2025-08-14 095231.png 존 매길 <August>, 2008, 출처. annemagill.com


‘순수 기억’에 쏠린 어느 예술가의 이야기


꼬마 예술가가 있었다. 꼬마 예술가는 매우 정확하게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었다. 작은 차이들이 보였고 그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소녀에게는 늘 까다롭다는 핀잔이 돌아왔다. 그녀가 느끼는 차이는 주변을 불편하게 했다. 소녀는 생각했다. “내가 느끼는 것을 말하며 까다로운 사람이 될 거야. 까다로운 사람은 사랑받지 못해” 소녀는 말을 아꼈다.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가끔은 자신이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감을 믿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할 때도 있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꼬마는 예술가는 어른이 되어 사업가의 꼬붕이 되었다. 꼬붕이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꼬붕이는 열심히 일했다. 불안이 올라오고 흔들릴 때마다 일했다.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았다. 잠시라도 멈추면 꼬마 예술가 시절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감정에 압도될까 봐 견딜 수가 없었다. 술을 먹고 죽고 싶은 날도 있었다. 나를 잊고 싶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나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꼬붕이는 자신이 무언가를 억압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몸에서는 신호를 보내왔다. 내면의 꼬마 예술가가 소리를 질렀다. “멈춰! 그러다 우리 다 죽어.” 꼬붕이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수 기억을 뒤지고 다녔다. 작은 단서들을 따라 과거로, 과거로 들어갔다. 꼬붕이는 어렴풋하게 자신이 예술가였던 시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꼬붕이는 꼬마 예술가 시기로 퇴행했다. 그 과정에서 막혀있던 감각의 구멍이 다시 열렸다. 다시 어린 시절의 고통이 찾아왔다.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해도 이해받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본 것을 말할 수 없었던 그날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시 자기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혹시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닐까? 나의 망상인가? 꼬붕이는 꼬마 예술가 시기의 감수성을 되찾았지만, 자기부정의 시기도 함께 찾아왔다.


꼬붕이는 자극에 압도되기도 했다. 너무 많은 자극이 한 번에 밀려 들어와 혼란스럽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의 특징을 알아채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부정했다. 혹은 말을 돌리거나 회피했다. 혹은 아예 들리지 않는 척했다.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려 왔지만, 자신조차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생생한 감정을 다시 느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이 있는 그대로 몸에 꽂히는 진동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꼬붕이는 자기를 안전하게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여기로 갔다가 저기로 갔다가 정신없이 헤매었다. 그러다가 탈진하고 말았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예술가는 혼란의 시기를 방황한다.


혼란과 불안 속에서도 꼬붕이는 예술가로 회복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혼란스럽더라도 그런 채로 자신을 견뎌 보기로 했다. 조금씩 자신의 예술가적 기질을 장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자극에 예민하며 조금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심지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가끔은 자기에 도취하여 꼴사납게 구는 일도 있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너 T야!”라는 식의 비난을 하기도 했다. 자기도취에 빠진 예술가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자기에게 도취한 예술가의 끝은 좋지 않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을 못 본 척하거나 파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꼬붕이는 자기부정의 예술가 시기를 지나 자기도취에 빠진 예술가 사이에서 어딘가에서 다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새로운 예술가를 알게 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 수 있다. 세상의 변화를 파악하고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자각하고 있다. 스스로 어떤 무늬를 그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스스로가 네모가 되고 세모가 되고 별이 되기도 한다.


때론 계속 변화하는 이들을 보며 세상의 누군가는 변덕쟁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변덕’이라는 말에 쉽게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변덕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덕을 아름답게 만들 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능동적인 변덕쟁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감각을 부정하지도 자신이 느끼는 것이 특별하다며 자기도취에 빠지지도 않는다. 또한 타인에게 이해받기 위해 변명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때의 예술가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 모습을 바꾼다. 너가 바람이라면 나는 흔들리는 잎사귀가 되고, 너가 햇살이라면 나는 해를 쫒는 꽃이 된다. 너가 물처럼 흐른다면 나는 강물이 되고, 너가 하늘이라면 나는 하늘을 담은 호수가 된다. 이들의 변덕은 단순한 변심이 아니다. 변신이다. ‘너’와 함께 새로운 ‘나’가 되고 싶은 변신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다.


스크린샷 2025-08-14 095421.png 존 매길 <Midnight>, 2011년, 출처. annema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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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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