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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어디서 만나는가?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해설 수업 후기 (5)

by 정희주

마음의 모양


심리학자와 철학자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마음의 모양을 구조화하여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트부터가 시작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나누었다.[그림1] 의식은 일상에서 기억하고 사고하는 부분이며 빙산으로 치면 수면으로 올라온 눈에 보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빙하처럼 개인의 무의식 속에는 의식화되지 못한 억압된 기억과 욕구가 있다. 무의식은 아주 깊은 심연에 억압되어 있다가 특정한 계기를 만나 전의식으로 올라오고, 그중 일부가 의식화된다.


융이 설명하는 정신의 구조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그림2] 융은 무의식을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으로 구분했다. 개인적인 기억과 소망의 억압은 개인의 무의식 차원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인류나 자연속에 존재하는 집단적 무의식이 개인의 정신차원에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설화나 유사한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프로이트와 융이 설명하고 있는 정신의 구조를 단순화시키면 삼각형의 모양을 그리고 있다. 심층적 무의식이 있는 밑면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상승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구조이다. 제일 상위층에서 의식화와 행동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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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베르그손 이러한 삼각형의 마음의 구조를 뒤집은 역원뿔의 도식을 제시했다.[그림3] 이미지가 선명하게 형성되지 않은 순수기억(A-B)에서부터 표상화된 상기억(A'-B, A''-B'')을 거쳐 신체가 행동하는 습관 기억(S)까지 거꾸로 떨어지는 모습이다.


베르그손이 삼각형이 아닌 역원뿔 도식을 설명한 것은 기억(정신)에 시간의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구조는 아래에서 위로 쌓이는 형상이지만 역원뿔은 위에서 아래로 수축되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기억(정신)은 과거 현재 미래가 선형적(linear)인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응축된 지속(durée)의 시간이 S(몸, 습관기억)로 수렴되는 모습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일상의 평면(P)에서 살고 있는 각자의 몸은 저 다마 수많은 역원뿔 모양의 지층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저마다 자기만의 표상체계(인식체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상기억이다. 어떤 사람은 순수기억에 가까운 상기억(A'-B')이 맺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습관기억에 가깝게 상기억(A''-B'')이 맺혀 있을 것이다. 순수기억 가까이에 상기억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기존의 상식과 관적 개념이 잘 형성되지 않을 것이고 습관기억 가까이에 상기억이 맺혀 있는 사람은 반대로 일반 개념이 강하게 형성되어 보수적인 태도를 지닐 것이다.


수업에서는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과 '습관 기억'을 극단적으로 '예술가'와 '사업가' 혹은 '미술관'과 '군대'로 비유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 극명한 대비는 머릿속에 하나의 화두를 만들어 냈다. 이토록 다른 “'너'와 '나'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이 생각은 수업 내내 따라다녔다.



마음들은 어디서 만나는가?


그때부터 베르그손의 역원뿔 도식이 복잡하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모양이 될지 머리속의 이미지가 선명하지가 않았다. 역원뿔과 역원뿔이 만나는 모양을 평면 위에 그려달라고 챗GPT에게 질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AI조차도 너무 복잡해서 그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쓴 프롬프트가 허술했거나 AI가 참고할 만한 데이터가 없었던 탓일 것이다.


내 식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잡지에서 마음에 끌리는 이미지를 찾아 역원뿔 도식으로 이미지들을 붙여 보았다. 나의 취향과 끌림 속에는 나의 기억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몸에 가까운 것부터 시작했다. 숨바꼭질하듯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로서의 기억과 아이로서의 기억 동시에 떠올랐다. 사랑을 하고 갈등했던 순간에서는 잠시 멈추었다가 어디론가 길을 찾아 걷고 걷는 모습을 보며 작업을 이어갔다. 기억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깊은 심연의 얼굴에 끌리기도 했다.


KakaoTalk_20250813_181905926.jpg 나의 기억, 나의 물질


기억은 내 몸에 저장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베르그손은 기억은 몸에 있지 않다고 했지만 인식체계가 바뀌지 못했다.) 그래서 정신이라는 것이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콜라주를 완성한 후 알았다. 어쩌면 기억은 내 신체가 비추고 있는 테두리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수많은 진동 속에서 나의 정신이 포착한 테두리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억은 몸(뇌)에 없다. 몸은 기억을 재생하는 매개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 지속의 시간을 품고 있는 물질이라면 책이나 그림 또한 강렬한 순수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오래된 도시, 고통 속에서 그려진 그림, 치열한 사유 속에서 쓰인 글들은 강렬한 끌림을 갖게 한다.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람이 준 물건, 정성스럽게 쓰인 편지, 진심으로 고민하고 건넨 짧은 말 한마디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물질 속에는 기억(정신)이 담긴다. 지속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 물질이라면 그것은 어디서든, 언제든 정신의 운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너'와 '나'는 어디서 만나는가? 우리는 지속의 시간에서 만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만난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는 만큼 만난다. '너'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너'에게 관심을 가지는 만큼, '너'를 위하는 만큼 만난다. 그런 만남은 서로의 몸을 변형시킨다. 할 수 없던 것을 하게 한다. 모르던 것을 알게 한다. 어제와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지속의 시간은 사랑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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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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