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
미술관에 가면 나는 놀이의 술래가 되어 ‘너’를 찾는다. 한 점 한 점 그림을 훑으며 ‘너’에게로 간다. 몇 개의 그림들이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한동안 눈길을 준 후 발길을 돌린다.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림이 불현듯 나를 부른다. 제일 구석진 곳에 드러내지 않은 곳에 ‘너’가 있었다. ‘너’는 내게 말을 건넨다. “기다리고 있었어.”
‘너’를 눈으로 쓰다듬어 본다. 내 몸이 조금씩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깊은숨을 쉬며 최대한 몸을 이완시켜 본다. 오래 보고 싶기 때문이다. 색과 선을 더듬어 본다. 차가운 새벽공기, 빛을 기다리는 대지, 얼어붙은 나뭇가지 그 위에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나무가 있다. 나무를 따라가 본다. 서걱서걱 말라 있지만 여전히 목마름을 느낀다. 나무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죽은 것이 아니다. 죽어야 끝나는 삶. 내가 끝날 수 없는 삶. 모든 것이 다 해야 끝나는 삶을 알기에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산발적으로 펼쳐져 있지만 캔버스는 그것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캔버스 밖으로 뻗어 나가고 싶지는 않다. 캔버스 안에서 어떻게 담아두려고 하지만 그저 헤맬 뿐이다. 어지러운 나뭇가지들은 연필로 표현했다. 밑 색의 유화 물감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내는 듯한 뾰족한 나뭇가지들. 밑동은 얼어 죽어가면서도 나뭇가지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나무를 알고 있다. 오랜 시간 사랑했고 오랜 시간 원망했고 오랜 시간 그리웠던 이가 소멸하는 모습에서 이 나무를 보았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나무의 안간힘을 보았다. 희망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책임이 없다면 감당할 수 없는 나무의 의지를 보았다.
처음에는 마른 나뭇가지를 보며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 사람 다음에는 슬픔을 느꼈다. 죽어간다는 것이 너무나 애석하고 안타까웠다. 곧 나를 떠난다는 생각에 깊은 상실감과 고독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인 것을 알기에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젊은 나의 오만이다. 젊고 싱싱하고 피어나는 것만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다. 가을 나무는 사계를 품고 있다. 나무는 추운 겨울은 견뎌내고 봄에 기어이 싹을 틔워냈으며, 한여름의 땡볕과 태풍을 통과했다. 가을에는 가장 사랑하는 태양 빛으로 자신을 물들였고 이제 곧 다가오는 겨울을 겸손히 맞이하고 있다. 오는 것을 막지 않고, 가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나무의 겸손함이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쇠락하는 것의 지난 시간을 펼쳐 보여준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