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죽음과 삶
합리적인 근거 없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항상 금기의 단어였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사놓고도 한참 동안 읽지 못했던 이유다. 죽음을 알고 싶어서 선택한 책을 죽음이 두려워서 읽지 못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시간의 약을 먹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뎌진 것일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었다. 셸리 케이건은 영혼은 없고 영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두려움은 죽음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죽음학 수업 두 번째 책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중대한 차이가 있다. 죽음을 앞둔 즉 수개월 뒤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이의 글이라는 점이다. 최초로 죽음학을 강의했다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철장을 나온 호랑이’에 습격당한 이가 쓴 글이다. 호랑이의 습격을 받았지만 그는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이어령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6살에 굴렁쇠를 굴리다가 존재의 정상 시간인 정오에 경험했다는 죽음의 느낌. 죽음과 삶의 간격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멀지 않다는 느낌을 그는 이야기한다.(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가 나오기 직전의 정적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뜻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김정운 작가가 방송 생활을 접고 여수로 가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어령의 말 ‘인생의 피크는 함부로 만드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새롭게 다가왔다. 인생의 피크에서는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글쓰기가 종교
메멘토 모리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지만 자신의 몸을 들짐승에게 맡기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스님이나 계룡산에서 득도하신 신선의 이야기만큼이나 아득하다. 나의 피부에 와닿은 것은 쓰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한 발짝의 축복이었다.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네.
쓸 수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몸과 마음이 느꼈기 때문에 쓰는 자가 내딛을 수 있는 한 발짝은 현존하는 해결책처럼 느껴진다.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줄 것 같은 실감을 준다.
이어령은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의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글 쓰는 사람은 무조건 실패한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반면, 완성의 허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글쓰기는 매력적이다.
나에게 행복은 완벽한 글 하나를 쓰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을 실패한 글이라네....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인 글은 완성되지 못한 글이야....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미완성의 글이지만 죽음 이후에도 글은 남는다. 마치 미완성의 삶처럼. 그래서 ‘내가 죽거든 이 책을 내라.’는 이어령의 말은 자신의 죽음과 글의 탄생을 맞바꾸고 싶어 하는 자식을 낳는 아비의 말처럼 느껴진다.
영국 철학자 베이컨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분류가 있다고 한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와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는 부류와 꿀벌처럼 스스로 꿀을 만드는 부류다.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 먹는 나와 여러분 같은 현실적인 사람들이고,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든다. 개미와 거미는 수집(gathering)하지만 벌은 화분을 꿀로 변형(transfer)시킨다. 이어령은 그게 창조고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꿀벌은 에고이스트다.
나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에고이스트지.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 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먄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글을 쓰는 사람은 에고이스트라는 말은 꿀벌이 되고 싶은 에고이스트인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지성, 영성, 지혜
책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깟 책 읽으면 뭐하나? 죽으면 다 까먹을걸.’ 영원한 것이 없다는 인식이 명징해질수록 지식을 쌓는 자의 허무함도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사색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열심히 읽었다. 몇 년 전에 회사 후배가 이어령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선물했을 때 읽어보지도 않고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이어령도 이제 나이가 드니 종교로 기우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지식의 허무함을 더욱 느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가 단지 종교의 힘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성경도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 예수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한 마리 양을 구하러 간 것은 아흔아홉 마리도 한 마리 한 마리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욥이 ‘이 고통을 반석 위에 쓸 수 있다면’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씀으로 인해서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그의 글쓰기의 신념으로 해석한다. 또한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는 나답게 존재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해석한다. 신에게 죽음을 의탁한 이의 자세가 아니다.
종교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도 경계한다. 그는 오히려 존재의 개별성을 믿고, 논문의 주석이라는 비 주체성을 견디지 못해 특정 학문을 오래 공부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생을 흩어진 눈으로 산책하면서 도시의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벤야민이 말한 ‘플라뇌르’에 가까운 자유주의자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되, 삶의 모든 것을 융합과 통합의 과정으로 보고 중용의 삶을 추구하라는 것은 지자(智者)라고 불리는 이들의 전형적인 가르침이다. 디지로그를 주장하고, 우뇌와 좌뇌를 골고루 쓰고, 편집증(paranoia)과 조현병(schizophrenia)을 겸비했고, 인간을 지우개 달린 연필로 본다. 전술했듯이 한쪽으로 치우친 종교와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경계하고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윌리엄 포크너를 믿는다. 대선에서 나타난 이념의 양극화와 냉전의 기운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는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새겨볼 만한 가르침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앞둔 이의 말과 글은 허투루 듣고 함부로 읽을 수 없다. 한 마디, 한 단어에 한 인간의 평생의 삶이 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쓴 작품은 독자가 몇 시간의 시간을 내어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한 작가의 한평생에 대한 이야기라면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일독의 가치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 책의 단점을 말하자면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이의 글에서 나오는 울림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공간적 환경의 제약에 따른 한계도 분명하게 보였다. 모든 이의 가르침에는 한계가 있다. 이어령도 예외는 아니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인터뷰어의 과장된 반응도 거슬렸다. 인터뷰이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이 이해가 되면서도 인터뷰이를 찬양(?)하는 듯한 멘트들은 중간중간에 독서에 맥이 풀리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와 같은 단점은 이 책이 주는 감동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 지식과 지성과 지혜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이 책을 읽고 내 삶이 어디쯤 와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잠시나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한다.
Memento 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