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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Jan 29. 2022

[단편] 적당한 거리

단편소설

J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후배다. 게다가 J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셨다. 대학교 2학년 올라가던 해에 아버지가 회사 직원의 아들이 우리 과에 합격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 그도 아버지들 간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흔치 않은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J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일까? 아버지 회사에서 유일한 자랑거리여야 하는데 아버지의 자긍심이 반감된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J는 무슨 이유로 나를 멀리 하는지 늘 궁금했다. 하지만 직접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한 번도 J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대학 동기나 선후배를 통해서 간간이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얼마 전 오지랖 넓은 대학 선배가 강남 근처에서 일하는 선후배들을 긁어모아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J가 나온다고 했다. 나는 나가지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점심 한 끼 먹고 온다고 생각하고 오지랖 선배에게 나가겠다고 말했다.


졸업하고 처음 만난 J와 나는 서로 어색했다.

식사 도중에 J가 말했다.

“P 고등학교 나오셨죠?”

P 고등학교는 J와 내가 지옥 같은 3년을 보낸 곳이다. 그때는 서로 몰랐지만 지옥 같은 3년 중 2년의 공통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J의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나의 3학년 담임선생님이었고 그분은 나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셨다. 녀석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체하는 느낌이었다. J는 그런 녀석이다

그날 점심 이후 J는 나에게 갑자기 자주 연락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으니 점심을 같이 먹자는 톡이 자주 왔다. 한 번은 들어주고 한 번은 무시하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계속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점심 초대 톡은 지속되었다.

“선배님 회사랑 우리 회사랑 메타버스 관련해서 같이 해볼 사업이 없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야 그동안의 끊임없는 점심 초대가 이해가 되었다. 그의 명함 속 직함이 신사업 개발팀장이었던 것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내가 갑자기 ‘선배님’이 되었겠는가?

“메타버스? 그거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있기는 한데 사업이 될만한 게 있을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우리 회사에도 신사업 개발팀이 있는데 그쪽 연결해줄까?”

“네 좋죠…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의 입에서 다시 선배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 후 의례히 진행되는 카페 행을 생략하기 위해 곧 미팅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신사업 개발팀의 차 팀장에게 J의 명함과 제안 내용을 전달한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대충 검토하고 마땅한 아이템이 없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나는 J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예전의 내 팀원이었던 차 팀장이 부담을 느낄까 봐 부담 갖지 마라고 말했다.

나의 무성의함과 달리 차 팀장은 마침 메타버스 분야에서 같이 협업할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고 반가워했다. 팀장 승진 후에 실적에 대한 부담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반가워할 줄은 몰랐다. 의외의 반응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잘해보라고 차 팀장의 어깨를 툭툭치고 돌아서면서 J의일은 잊어버렸다.


J로부터 톡이 온 것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선배님께서 잘 도와주셔서 차 팀장과 함께 할 사업 아이템이 준비되었습니다. 석 달 뒤에 서비스 론칭할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이란 말이 다시 한번 거슬렸지만 J보다는  팀장을 위해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질 고약한 팀장 밑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던  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팀장은 팀원 시절 그렇게 훌륭한 팀원은 아니었다. 일처리가 느리고 윗분들이 좋아할 만한 보고 포인트를 찾는 것에 애를 먹었다.

“네가 임원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업을 좀 봐봐!”

내가 차 팀장을 야단칠 때 항상 하던 말이었다. 이 말은 회사에서 부사장까지 올라가셨던 아버지에게 귀가 닿도록 들은 충고였다. 나도 아버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하직원을 다그칠 때 항상 같은 말을 반복했다. 차 팀장은 나에게 꾸중을 들을 때면 항상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발끝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은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나의 인색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운이 작용했다. 차 팀장과 승진 라이벌이었던 친구가 별안간 회사를 떠난 것이었다. 연봉을 1.5배 이상 부풀려서 이직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J가 저녁을 사겠다고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나는 마지못해 그의 초대에 응했다. J는 우리 둘과 어울리지 않게 이탈리언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연인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테이블이 작고 앞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J와 차 팀장이 준비하고 있는 사업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우리의 대화 소재가 소진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잘 계시지?”

나는 공통된 화제를 떠올리다가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다던 J의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돌아가셨어요. 오래전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차라리 침묵할 걸 하고 후회했다. 간간이 J의 소식을 전하던 선후배들에게 J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햇수를 계산해보니 J의 아버지가 퇴사한 것은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랬구나. 괜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오래전 일인걸요.”

한참을 말이 없다가 J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다니시던 회사에서 쫓겨나서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상사가 많이 힘들게 하셨었나 봐요. 그런데 사업이 잘 안 돼서….”

J는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문장의 결론을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선배님 아니었으면 올해 말에 팀장 보직 빼앗기고 지방으로 발령 나거나 대기발령 났을 거예요. 작년 말에 회사로부터 경고받았었거든요.”

와인 한 잔을 비우고 나서 상기된 얼굴로 J가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윗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라고…. 저는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내가 윗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윗사람처럼 생각하라는 건지….”

그 말을 듣고 정신 번쩍 들었다. J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한 회사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J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 밑에서 일하셨던 것일까? 두 분 다 이 세상에 안 계신 마당에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저 J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금 그와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오지랖 넓은 선배가 점심 초대를 하기 전의 거리가 우리에게는 적당한 거리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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