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별일이 없으면 점심시간에 산책을 한다. 영원회귀처럼 반복되는 하루 일과 중 유일하게 사색을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산책을 하기 위해서 주로 혼밥을 한다. 아무래도 동행이 있으면 밥 먹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식사 후에 커피라도 한잔 마시면 소중한 점심시간이 모두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나의 산책은 칸트나 쇼펜하우어가 그랬던 것처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코스로 이루어진다.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를 나와서 삼청동 쪽으로 걸어간다. 경복궁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기 위해서다. 삼청동까지 가는 길에 마주하는 사람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분들이다. 예전에는 소녀상 때문에, 요즘에는 일본이 바다에 핵폐기물을 버린 사건 때문에 시위가 일어난다. 일본에서 조선인 학교 차별을 중단하라는 피켓도 자주 보인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삼청동이다. 겨울에 산책할 때마다 느끼는 놀라운 현상은 이 횡단보도를 경계로 기온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변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빌딩 사이로 세차게 부는 바람이 삼청동에서는 사라지는 탓일 것이다. 햇볕이 나는 날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아무리 추워도 산책을 할 수 있다. 이 횡단보도는 날씨뿐 아니라 전반적인 산책의 분위기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도 한다. 횡단보도는 현재에서 과거로, 속계에서 선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걷는 길은 항상 운치가 있다. 한복을 빌려 입고 나란히 걷는 커플은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건춘문을 지나 경복궁 동쪽 입구에 다다르면 가끔 야외수업이나 소풍을 나온 유치원생들을 볼 수 있다. 선생님의 인도 하에 친구들과 손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기도 한다. 이 길은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서 하늘이 잘 보인다. 경복궁 돌담길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언제 봐도 예술이다.
돌담길을 따라서 걸으면 삼청동에 도착한다.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은 가게의 유리창에는 ‘임대문의’라는 글자가 걸려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자주 가던 식당이 벌써 두 곳이나 문을 닫았다. 삼청동에서 주로 먹는 점심은 토속적인 음식으로는 야채 백반, 청국장, 칼국수, 소머리 국밥이 있고, 원래 이탈리언 맛집이 많기로 유명한 삼청동이므로 파스타를 먹기도 한다. 일단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다. 북적이는 구내식당이나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광화문 식당보다 한적하게 점심을 즐길 수 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청와대 쪽으로 다시 산책을 시작한다. 삼청동까지 걸어가는 산책도 좋지만 삼청동에서 청와대 쪽으로 가는 길에서 본격적으로 산책은 시작된다. 청와대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산책을 한다. 중간중간 보이는 갤러리나 옷집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껏 북돋아준다. 청와대 춘추관을 지나면 배틀 그라운드에 나오는 UMP 기관단총을 어깨에 맨 경호대를 볼 수 있다. 배틀 그라운드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서 아직도 사진을 찍는 것에 실패했다.
춘추관을 지나 청와대 정문을 향해 갈 때 가끔 헬리콥터가 청와대에서 뜨거나 내리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에는 잠시 멈추거나 빨리 지나가야 한다. 바람이 어마 무시하게 불기 때문이다. 청와대 정문 이르면 어김없이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분들이 있다. 의도치 않게 그분들의 스마튼폰에 내 모습이 담기는 것이 싫기 때문에 살짝 돌아서 지나간다. 신무문을 지나 효자동 삼거리에 도착하면 청와대 사랑채 옆 공원에서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무엇이 그리 억울하신지 날마다 나오셔서 피켓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이제부터는 경복궁을 왼쪽으로 두고 돌담길을 걸어간다. 청와대 앞 길 단풍도 좋지만 나는 경복궁 돌담과 단풍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이 길을 가을에 특히 더 좋아한다. 오른쪽으로는 서촌 마을이 보여서 더 운치가 있다. 영추문을 지나 경복궁 서쪽 입구 문으로 들어선다. 오른쪽으로 국립 고궁박물관이 있다. 국립 고궁박물관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나는 좋아한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나온 듯한 어마 무시하게 큰 나무다. 여름에는 그 나무가 주는 그늘 아래에서 가끔 쉬어가기도 하고, 가을에 그 나무가 선사하는 진노란 색을 음미면서 걷기도 한다.
용성문을 지나 광화문으로 나오면 항상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훈련을 잘 받은 수문장들이 근엄한 얼굴로 교대식을 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 나는 다시 그들의 카메라에 찍히지 않으려 황급하게 광화문을 나온다. 나는 매일 보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비행기 타고 와서 사진을 찍어대며 본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다. 새로움이란 늘 상대적인 것이다.
광화문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항상 보는 차량이 있다.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고 문재인 물러가라고 외치는 차량이다. 차량에는 박정희와 이승만과 박근혜의 사진이 붙어있다. 날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정치적 이념을 떠나 정말 열심히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보행하는 시민들을 위해서 데시벨은 낮춰 주셨으면 좋겠다.
나처럼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날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인도 있고, 자덕들의 업힐 코스 중 하나인 북악 스카이를 가기 위해 멋진 빕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자덕들도 보인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다 보니, 이름도 직업도 모르지만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나도 그 사람들에게 낯익은 존재가 되고 있을까? 모르는 사람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전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광화문 쪽으로 이직을 한 이를 만나기도 했고, 휴가를 내고 아내와 산책을 하던 후배를 만나기도 했고, 반대편으로 돌면서 산책하던 직장 동료를 만나기도 한다.
40여분 걸리는 이 산책길은 만남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오전에 했던 미팅을 생각하기도 하고, 쓰고 있던 보고서의 제목을 생각하기도 하고, 쓰고 있는 글의 구성을 생각하기도 하고,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를 떠올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일일일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시를 하나 외우고 산책길 내내 그 시를 읊조리면서 걷는 것이다. 김영하가 학교 다닐 때 일일일시를 해서 글쓰기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 해서 나도 따라 해보고 있다. 효과는 음... 아직 잘 모르겠다.
영화 <페터슨>은 뉴저지의 페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시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매일 페터슨 시의 같은 코스를 운전하면서 시를 쓴다. 영원회귀 같이 똑같은 공간과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시로 표현한다. 짐 자무시 감독은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산책을 통해 광화문은 나에게 ‘만남’과 ‘사색’과 ‘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