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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강 Nov 23. 2020

한일기본조약과 박정희에 대한 분석

외교정책분석론적 관점에서

 한국에게 있어 일본이란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무역 상대이자 경쟁자인 동시에 국내 정치의 측면에서 흔히 ‘국민 정서’라 일컬어지는 역사적 공감대에 따른 반감의 대상이다. 박정희는 집권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이와 동시에 인권을 탄압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군사정권의 독재자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듯이 박정희의 군사독재 역시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박정희에 대해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친일적 행적이며 그 대표적인 외교적 사례 중 하나가 한일기본조약이다.

 한일기본조약은 1965년 6월 서명되었으며 부속협정으로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역시 타결되었다. 그러나 이후 현재까지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여부 및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역사적 인정 및 일본 정부의 사죄 요구 등의 문제에 대해 한일 양국 간의 대립이 여전하다는 사실은 일제강점기로 인한 외교적 분쟁이 지금까지도 이어짐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일청구권협정에서 한국은 전승국으로서 전쟁배상을 받은 게 아니며 국가 분리에 따라 재산에 대한 청구와 소유의 권리에 대해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역사 인식 문제를 비롯하여 피해자에 대한 보상 여부 등이 끊임없이 불거졌다. 이렇듯 한일외교는 현재까지도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 한일기본조약이 박정희 정부에 의해 타결된 것에는 독재자이자 최고정책결정권자인 박정희 개인의 영향이 크며 의회는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 의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외교정책이란 최고정책결정권자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야당의 반대가 한일기본조약 타결과 한일국교정상화를 막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외교적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외교정책분석론적 관점을 일부 채택하며 외교정책 결정구조에 있어 개인 변수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박정희 정권의 한일기본조약 타결에 대해 분석하겠다.

 박정희 정권 아래 이루어진 제 3, 4공화국의 외교정책을 분석할 때에는 박정희가 판단한 핵심 이익 역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다른 정부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한민국의 생존이었으며 이를 추구하는 방식이 경제성장과 안보 안정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박정희는 철저히 중상주의적인 정책을 펼쳐왔는데, “그는 한국처럼 자원이 적은 국가는 무역증대를통해 국가의 부를 축적할 수박에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무역대국을 지향하였다.”[1] 물론 월남전 파병과 같은 외교적 결정은 경제 성장이 부차적 이익이었을 뿐 주된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 진전과 이를 통한 안보적 안전 확보였으나 다양한 외교적 결정에서 경제적 성장을 추구해 왔다. 한국은 당시 국제적 신뢰도가 낮아 차관을 빌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경제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 역시 없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게 지원한 유상 경제협력은 한국이 대가를 지불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외 차관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보이는 상황에서 일본에게 받은 원조는 국내에 제철소와 화학공업단지를 만들고자 하며 시설을 세워 중간재를 수입하고 완성품을 수출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하고자 하는 박정희의 목표에 부합했다.

 다만 월남전 파병 이후 닉슨이 당선되면서 박정희가 미국과의 동맹이 직접적인 한국의 안보적 위기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한 것은 한일기본조약 이후의 일이다. 파병에 따른 안보적 위기는 1968년부터[2] 시작되었으며, 자주국방은 이 이후 강조되기 때문에 한일국교정상화는 오히려 미국에게 협조하기 위한 외교적 결정이라고 보인다.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준거해 타국에 비해 불리한 입지를 가짐에도 더 큰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 당시 미국에게 있어 자본주의 진영에 위치한 우호국인 한국과 일본이 차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존재하는 동맹국으로서 함께 싸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필요성이 있었고, 따라서 일본에게 한국을 대상으로 큰 금액의 보상을 시행하도록 압박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이승만 정권 당시부터 오랜 시간 한일국교정상화문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으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에게 협조하여 경제적 안정을 꾀한 결정을 내렸다. 박정희 개인은 이승만과 비교해 미국보다는 일본을 신뢰하였으며 파병을 제외하고는 미국과 지속적으로 긴장이 이어지는 외교적 관계에 있었으나 안보를 위해서 최고결정권자이자 국군의 수장으로서는 미국에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는 박정희 개인에게 있어 일본 군대 출신이라는 과거를 긍정적으로 희석하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 총리와의 만남에서 “과거의 일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발언한 것은 이러한 심리의 반영이라고 해석된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으며 공산주의 집단에 몸담았던 인물이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실리와 자신이 판단한 국익을 위해 반공산주의를 천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 이후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한 것은 한국의 생존을 위해 일본이 필수적이라는 외교적 핵심 이익의 판단에 기반을 두기도 했으나 박정희 개인에게는 자신의 친일적 과거도 개인의 생존과 후사의 도모를 위해서라면 용납 가능하다는 가치관을 강화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친일적 행보로 일제강점기 당시 군사 엘리트로 살아남았으며 대한민국은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얻은 달러로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에 “주요 외교정책 결정과 집행에 있어서 외무부를 비롯한 공식적인 기구보다 그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소수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3] 이때 박정희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일본 외상을 만나 대일 청구자금의 규모를 타결짓고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했다. 김 전 총재는 이 때문에 '대일 굴욕외교'의 상징인물로 몰렸고, 여당 대표직 사퇴→외유 등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뒷날 사석에서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청구권 자금이)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석야 공저, '실록 박정희와 김종필')”[4]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자신의 의사를 지지하는 관료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여당이 야당의 반대에 부딪히자 단독으로 이를 승인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이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가 아무런 외교적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일기본조약의 국회 승인은 야당이 참석을 거부하면서 여당 단독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다. 6.3 항쟁으로 대표되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야당의 격렬한 반대는 8월 26일 선포된 위수령을 비롯한 강력한 조치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국내 행위자들의 이러한 반발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협상력을 강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미FTA 당시 국내의 반발이 결과적으로 정부가 타결을 강행하면서 협상에서 보다 나은 위치를 점할 수 있었듯 박정희가 국내의 격렬한 반발을 진압하고 한일기본조약을 타결하면서 협상력이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위수령까지 동원한 진압은 단순히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의 제거라는 단일 목적이 아닌 대일 협상력 강화라는 목적 역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야당의 반대는 그 목적이 한일기본조약 타결의 반대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해당 국익이 경제적 이익의 형태였기에 야당이 바라는 형태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외교적 협상력이라는 국익에 기여했다.

 박정희가 판단한 대한민국의 생존 방식은 안보와 경제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부국강병인데, 이를 위해서라면 인권과 민주주의적 가치는 우선순위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태도는 한국 사회에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대립을 초래했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경제성장만을 이유로 박정희의 군사독재 및 외교적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협조적인 관료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자신 개인의 가치관을 군 통수권자이자 최고정책결정권자로서 반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미국과 일본에게 협력하며 국가의 안보와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야당의 반대는 한일기본조약의 승인을 막지는 못했으나 협상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정희는 그 자신의 친일적 행보가 일신의 생존과 영달을 위한 것이었듯 대한민국 역시 안보적 생존과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는 일본과 국교를 유지하며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의 삶과 국가 외교의 방향을 정당화했으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출처:

[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정치외교사 II>, 집문당, p.393

[2]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정치외교사 II>, 집문당, p.399

[3] 구영록, <국가이익과 한국의 대외정책>, 국제정치논총 31집 (1991), p.25-26

[4] 막후선 김종필·오히라, 결단은 박정희·이케다, 중앙일보, 박소영 기자, 2005.01.18.

https://archive.is/20120711183156/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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