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이 즐겼던 <코미디 빅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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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글로 옮겨지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잃는다. 발화자의 음색과 톤, 감정, 글로 미처 옮기지 못한 그전의 맥락까지, 대화가 벌어지는 현장에서는 그것들을 다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레 해당 발화 안에 녹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글로 옮겨졌을 때, 제삼자의 시선에선 그 많은 요소가 생명력을 잃는다. 독자는 오직 주어진 사실에 집중하고 떠들썩하게 영향을 끼친 발화의 성격은 무미건조한 텍스트 속에 꼭꼭 숨겨진다.
지금껏 배워온 탈춤과 판소리의 성격도 이런 맥락과 비슷할지 모른다. 두 장르 모두 연희에 목적을 둔 공연예술로서 그 강렬한 본질인 ‘현장성’은 텍스트에서는 빛을 감춘다. 교과서에서는 매번 탈춤을 해학성이 강한 작품이라며 강조하지만, 이제껏 탈춤의 대본을 읽으며 웃음을 터트린 적은 없다. 이는 수백 년 세월의 차이에서 온 공감의 결여와 현장성을 잃은 공연예술의 텍스트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딴소리 판>은 이런 공연예술의 텍스트화에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감 있는 손을 내미는 기분이 들었다. “너희가 그토록 배웠던 탈춤의 해학성이 뭔지 알고 싶어?” “우리 조상들이 옛날에 어떻게 한바탕 놀았는지 궁금해?” 상상도 못 했던 텍스트의 반란을 <딴소리 판>이 실감 나게 구현해 낸다.
<딴소리 판>은 판소리 다섯 마당에 탈춤을 엮어 만든 퓨전 전통극이다. 판소리가 다소 경직된 장르라면 보다 유동적인 장르인 탈춤이 그 판을 유연하게 만든다. 특히 탈춤의 주체는 8명의 거지 광대로 대사, 연주, 유희. 심지어 창까지 담당하며 다재다능한 역할을 보여줘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8명의 거지 광대가 시끌벅적하게 무대를 뒤집어 놓으면, 해당 연극의 큰 줄기를 담당하는 판소리의 소리꾼과 고수가 다시 이야기의 본질을 바로잡는다. 《춘향가》부터 《흥부가》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을 판소리와 탈춤이 서로 티격태격 거리며 신명 나게 풀어나간다.
공연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으로 역시 첫 도입 《춘향가》를 잊을 수 없다. 이몽룡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한 춘향이 신임 사또 변학도의 숙청을 거절하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경험하는 서사를 소리꾼이 창으로써 풀어나간다. 소리꾼은 때때로 춘향에 이입해 대사를 뱉어내기도 하며 때론 전지적 시점에서 사건 전체를 관망하는 창을 뱉어낸다.
기존의 서사에서는 장원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출두하여 잔치마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춘향을 구해내는 모습을 그려내지만, 해당 연극에서는 이몽룡을 몰락 양반 “암행거사”로 그려낸다. 변학도는 암행거사를 암행어사로 착각해 아연실색하며 달아버리고, 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춘향이 거지로 몰락한 양반 이몽룡의 사연을 듣기 시작하고 거지 몽룡과 동반한 7명의 거지의 깽판 한바탕이 시작된다.
“이판사판 깽판이다!”
입장이 불리해지거나 위협이 가해질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8명의 거지 광대는 정형화된 판소리 판을 깨트린다. “이판사판 깽판이다~!” 하는 멘트와 함께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소품으로 리듬을 만들어 낸다. 때론 자신이 먹고 있던 쇠 밥그릇이 꽹과리가 되기도 하고 심청전에서 쓰인 대나무 막대로 질서 정연한 박자를 만들어 낸다. 그런 박자에 맞춰 소리꾼은 실제 판소리에 삽입된 창을 노래하고 남은 인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렇게 거지들의 흥겨운 깽판 한바탕 벌어진다.
4막에 해당하는 수궁가에서는 그 배경이 육지에서 바다로 변하면서 더 재밌는 광경이 펼쳐진다. 암전과 함께 밝아진 무대는 조명을 통해 실제 바닷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은은한 파란 배경에 햇빛이 물결에 따라 일렁이는 기분을 조명만으로 완성한다. 일순에 용궁으로 바뀐 무대에서는 그전까지 이야기에서 철저히 배제된 고수가 북을 등허리에 매고는 자라로 변모한다. 그리고 거지 8 총사와 소리꾼과 함께 창을 주고받으며 흥겨운 깽판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후반부에 도달해서야 판소리는 그 누구 하나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판을 형성한다.
“거지 거지 그런 거지,
너처럼 책임질 게 없으니 자유로운 거지~”
판소리 다섯 마당의 마지막, 《흥부가》에 와서야 <딴소리 판>은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책임질 처와 자식들을 두었지만 그에 반해 턱없이 부족한 경제력에 고민하는 흥부를 보고 거지 8 총사는 위와 같은 대사를 남긴다. 그들은 자식도 처도 없다. 있었을 수도 있으나 이미 그들에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집도 돈도 없으며 그저 밥만 제공한다면 그 어떤 일이든 해낸다. 아무 곳에서나 자고 하루를 의미 없이 허비하기도 한다. 그런 거지들에 대해 등장인물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존재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거지들은 해당 극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임을 바로 위 대사를 통해 증명한다.
물론 해당 작품이 거지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인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너무 쉽게 오해하던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싶다. 때론 너무 많은 책임이 사람을 메마르게 할 수 있고 가장 게으르고 불쌍하게 여긴 존재들은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영유할 수 있다는 것을 《흥부가》 부분에서 느낀 바이다.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공연 내내 웃음을 잃지 않고 감상했다. 이제야 정말 탈춤의 해학성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딘가 미숙한 존재가 현실에서처럼 도태되지 않고 도리어 더 높은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그 가운데 끝까지 해학과 유희를 유지한다는 점이 해당 공연의 특징이 아니었나 싶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선한 사람에겐 상을 주는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해당 공연에서 엿볼 수 없다. 그저 모든 존재가 한바탕 유희를 즐기고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을 채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한바탕의 깽판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