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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엄마 Mar 21. 2019

나 혼자 간다

그녀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

 오랜만에 혼자서 서울로 향하는 광역버스를 탔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내릴 때 카드를 대야 하는지 헛갈려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합정동과 연희동 일대를 돌아다니는 하루 동안 무슨 대단한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 없이 나왔다는 것에 신난 것도 있지만, 늘 남편이 함께인 것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혼자 있다는 것만으로 왠지 모를 긴장감이 계속 깔려있었다. 31년을 혼자 잘 살았어도 5년간의 결혼 생활이 더욱 강력하긴 한가보다. 남편은 내 메시지나 전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들뜬 기분에 약간은 서운함을 느낀 듯했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화장실 문을 연 채로 아이에게 내 볼일을 중계하지 않을 수 있고, 가방이 기저귀나 아이 간식 없이 단출했다. 뭐든 내 마음과 발길 닿는 대로 갈 수 있는 흔치 않은 소중한 날임은 분명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아요 / 출처: MBC <무한도전>

 

 친한 동생네 부부와의 선약과 저녁시간에 영화 세미나까지 하루 종일 혼자만의 시간을,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족 아닌 사람들과의 시간을 가졌다. 이왕 나가는 거, 드라이브도 하고 싶었으나 행여 답답해할 남편을 위해 차는 양보했다. 막상 집에 돌아와 하루 일과를 들어보니 날씨가 안 좋아서 나가지 않았다 했다. 서울도 바람이 매섭고 비가 올 듯하여 여유 있게 기웃거리며 나들이를 즐기려던 내 계획 역시 무산됐다. 딸은 12시가 넘어 돌아온 엄마가 반갑기는 한 모양인지 괜히 잠을 참아가며 놀다가 1시 30분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남편은 아이가 잘 놀다가도 자주 현관문을 쳐다봤다고 했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나 혼자 간다' 그거 어쩌다 한 번인데, 남편 혼자 집에 있었다고 꼭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언제 한 번 남편의 입에서 '독박 육아가 힘들긴 힘들구나.'라는 말을 좀 들어보나 학수고대하는데 단 한 번을 안 하니 더욱 감사하지 않으려고 했다. 육아와 살림을 못하거나 안 하는 남자와 너무 잘해서 마누라의 고생이 뭔지 잘 모르는 남자 중에 고른다면 그래도 후자가 낫긴 하지만 좀 얄미울 때가 있다. 오늘도 역시나

 "알아서 잘 놀아서 별로 힘들 거 없던데? 집안일도 같이 놀이처럼 하니까 괜찮던데."

라고 말하는 남편의 얼굴은 말과 다르게 아주 피곤해 보였다. 더구나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아이가 낮잠을 안 자서 큰 일을 못 봤다며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얄미움은 날아가고 감사함만이 남았다.


   왔어? 나 좀 잘게../ 출처: MBC <골든타임>

 

 지금은 동생네 부부로부터 선물로 받은 모과청을 타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렇게 모과차가 향긋하고 달달한 것이었나? 추위에 떨고 밤늦게 돌아와 마시는 차 맛에서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2시 선약 이후 이동하면서 경의 중앙선에서 30분가량 바람을 맞고 나서야 지하철을 탔다. 세미나 시간 내내 두통에 시달렸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광역버스를 한참 기다리느라 바람을 많이 맞았다. 날씨 탓에 구경한 것의 대부분은 경치가 아닌 이동하는 길에 스쳐가는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이었다. 날도 추운데 굳이 길가에 오도카니 마주 보고 서서 싸우는 커플,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멋을 낸 사람들, 주말에도 여전히 노트북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그 모든 게 유모차를 끌며 돌아다니던 우리 동네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가족 나들이에서는 경치 외에 내 시선이 닿는 곳은 결국 남편과 딸이다. 경치마저도 중점은 '좋은 배경 속의 예쁜 우리 가족'이 되어 버린다. 시선에 따라 으레 생각도 따라가다 보니 결국 가족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아기 엄마 말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최대의 동기부여가 가족인 것은 틀림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족하고 노상 붙어있다 보면 정작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과정은 흐릿해진다. 이는 늘 남편과 시댁 흉보기, 살림과 육아 노하우나 고충 등 쳇바퀴 도는 이야기만 하는 아기 엄마들과의 만남에서도 많이 느낀다. 요즘은 막상 만나고 나면 무료해지고야 마는 관계들, '에라이, 그냥 집에나 있을 걸' 그런 생각이 드는 관계들은 가지치기하고 있다. 전업주부라도 자기가 했던 공부나 일을 잊지 않고, 몇몇 분야에 관심이 있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자기는 뒷전인 채, 마음에 들어선 불안을 어쩔 줄 몰라 툭하면 점집에 가서 남편의 사업과 자식들의 미래를 묻고 주변과 자기 가족을 비교하는 인생으로 끝나고 싶지는 않다.  


 "언니 결혼생활이 원래 이래?"

 남편과 같이 산 지 3개월이 좀 지난 친한 동생은 이렇게 물어오며 청첩장을 건넸다. 우리 부부처럼 그들도 같이 살다가 결혼식을 이제야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결혼 5년 차에 아이를 키운답시고 신혼부부 앞에서 꽤나 주름잡고 있는 내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 혼란스러움을 지나온 자로서의 옅은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우리 부부는 소개팅으로 만난 지 2달 만에 살림을 합쳤고 1년 반 정도 살다가 식을 치렀다. 결혼식 전날, 이제는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데 도대체 결혼식을 왜 해야 하냐며 싸웠다. 일단 결혼식은 하고 좀 지난 후에 상황 봐서 이혼하자는 개 같은 합의를 했던 우리. 지금 생각하면 너무 우습기 짝이 없다. 막상 당일이 되어서는 소름 끼치도록 뻔뻔하게 식을 치렀다. 남편은 나랑 사는 게 너무 힘들었는지 축가를 부르다 말고 우는 바람에 세 마디 정도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말로는 가사가 너무 와 닿아서 울컥했다는데, 그 당시의 우리는 '정말 너랑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 외엔 다른 생각이 별로 없었다. 식을 마치고 나서는 급체가 와서 뒤풀이는 남편 혼자 가고 나는 집에 돌아와 연신 토하고 눕기를 반복했다. 진을 다 빼고 다음날 신혼여행을 가서는 도무지 왜 싸운 건지 기억도 잘 안 나서 황당했다.


참을 만큼 참... 지는 않았지만 갈 때까지 갔더랬죠. / 출처 : MBC <아빠 어디 가>

 "별 일 없지?"

 한 동안 어머님은 이렇게 우리 부부의 안부를 물으셨다. 요즘은 별로 못 들어본 것 같다.

양가 어른들은 우리 딸이 순한 것을 보고

"부모가 성격이 보통 아니니 애가 지 살려고 순한 거다."

라며 일침을 주셨다. 아직 5년밖에 안 살았지만, 적어도 이제 싸우다가 문짝이 부서지거나 청소기가 박살 나거나 그릇을 던지지는 않는다. 완벽한 타인이 될 것이 아니라면 싸움으로 인한 갖가지 손해마저 고스란히 우리 몫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청소기를 사고 16개월 동안이나 청소기 할부금을 납부하면서, 집에 놀러 온 손님마다 안방 문은 왜 없냐고 물어볼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어른스러워졌다. 날카롭던 턱선을 잃고 동글해진 것은 얼굴뿐 아니라 마음도 동그랗게 살이 쪄 간다. 우리 부부가 딸이 보는 만화 속 노래 중 '동글동글 동글동글 동그라미 친구들'그 가사를 반복해 부르며 부둥켜안고 빙빙 도는 것은 어쩌면 주문을 거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우 지각을 면하고 자리에 앉은 영화 세미나의 첫 번째 시간. 마이클 무어 [화씨 11/9 : 트럼프의 시대]를 본 후 의견을 나누기에 앞서 간단히 자기소개가 있었다. 영화감독, 교사, 회사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늦은 시간에 어린 아기를 두고 멀리서 온 전업주부인 나에 대한 호기심 어린 반응들이 재밌다.

"어머, 학생인 줄 알았어요."

이런 말을 들으니 잠시 두통이 가라앉았다. 30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고 보니 이런 말을 종종 들으면 주책맞을지라도 무조건 기분은 좋다.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들을 수 있을 때 많이 들어두고 싶다. 와인을 한 잔씩 나누며 트럼프의 시대를 열어준 이 시대의 불안과 공포에 의한 잘못된 욕망,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느 산으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육아나 살림과 상관없는 주제로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탁 트인 전망 앞에 서 있는 듯 상쾌했다.


 좀 더 나은 글쓰기를 위해서, 별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되기 싫은데 자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 했다. 시작은 영화지만 앞으로 문학, 철학, 예술, 정치, 사회 등 여러 분야를 세미나 활동을 통해 접할 계획이다. 매 시간마다 임의적인 순서로 글쓰기 과제가 주어진다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릴 때도 발표시킬까 봐 심장이 터질 듯 뛰면서 내심 발표시키기를 바라는 이상한 아이였다. 뭔가를 생각하고 글로 남기는 행위는 단조롭게 느껴지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그 글이 얼마나 매력이 있고 좋은 글인지 따지는 것은 다음 차원의 문제이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일종의 발표처럼  때의 설렘과 읽는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좋다. 내 생각과 감정이 러나 남겨지기에 아무리 제 멋에 쓰는 글일지라도 엄정(嚴正)할 수밖에 없는 글의 세계가 좋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이기를 / 출처 : tvn <어쩌다 어른>


 아이랑 뭘 할까, 빨래를 몇 번 돌려야 하나, 저녁 메뉴는 뭐가 좋을까, 그런 생각은 다 제쳐두고 오로지 나에게 집중한 하루였기에 바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느긋했다. 가끔 늘 있는 곳, 늘 함께 하는 사람들과 멀어졌다가 다시 그 위치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오늘 같은 하루가 있어야 잠든 딸과 남편이 좀 더 사랑스러울 수 있고, 난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은 여자임을 잊지 않을 수 있다.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디든, 가끔씩, 나 혼자 갔다 오면 된다.


커버 이미지 출처 : herald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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