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하나, 장례식장이 다녀와서
주말에 아이에게 늦은 아침을 차려주고 운동을 두 시간 가까이한 후 씻고 나와 8년 만에 딸아이 돌잔치에 입었던 블랙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 언니의 친정아버지 장례식에 가야했다. 적당히 탄탄하면서도 매끈한 소재에 팔선과 허리선 모두 뚝 떨어지는 일자라인과 목선과 소매에는 화이트 라인과 콩단추 포인트가 있는, 간결하지만 약간의 귀여움이 있는 원피스다. 화이트 포인트가 과하지 않고 어차피 까만 옷이 거의 없다 보니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한 치수 큰 옷을 입을 때였는데 막상 사고 보니 핏이 너무 퍼져서 몸통 부분을 약간 줄였다가 행사 내내 배에 힘을 주느라 진땀을 비질비질 흘렸다. 지금은 배에 힘은커녕 여유가 철철 넘쳤다. 달라진 몸매에 뿌듯한 마음과 돌잔치 무렵의 아이와 훌쩍 커버린 아이의 현재의 모습이 비교되면서 기분이 좀 오묘해졌다. 매일 똑같은 하루, 주말도 거기서 거기, 여행을 가도 별 감흥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고 중간중간 나름의 사건은 있었으나 유년기의 삶에 비하면 비극은 없었던 11년이었다. 그렇게 사실은 행복한 11년을 보낸 것이다.
장례식장은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같은 반 아이엄마이고 집이 서로 앞뒤 빌라라서 종종 마주치는, 간혹 물건을 대신 받아주기도 하고 서너 번 학교 일정으로 마주칠 때면 커피 한잔 함께하던, 다소 얕은 친분에 비해 대화가 참 편한 언니다. 부고 소식은 언니가 학교 일정을 물어보려고 나에게 전화가 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중증 질환을 앓고 계신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많던 언니에게 병환도 없었고 사고도 아닌 채 갑자기 밤중에 가신 아버지의 소식은 심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친인척의 장례식 외에 지인의 장례식장에는 처음 가보는 거였고 다소 무덤덤한 심정으로 들어섰다. 비가 온 직후, 아직 비구름이 잔뜩 낀 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보랏빛의 가을 하늘과 맞닿은 장례식장과 무거운 표정으로 드나드는 검은 복장의 사람들의 풍경이 서늘했다. 오후 5시가 조금 안되었을 무렵이었는데 이미 한차례 손님들이 왔다간 것인지 식장은 한산했다. 자주 신지 않아서 관리가 안 된 구두 밑굽 한쪽이 닳아서 속굽이 드러나 걸을 때마다 너무 쨍한 소리가 나서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걸었다. 어쨌든 딸아이 친구의 엄마니까, 딸도 데리고 갈까 고민했지만 아이까지 옷 갖춰 입히고 나가려면 더 시간이 걸릴 거라 관두었다.
아이 친구가 뽈뽈뽈 걸어오더니 인사를 해주었다. 나는 아이 이름을 부르며 안아주었다. 할아버지와 추억이 많은지 적은 지 조차 알지 못하기에 그 이상 섣부른 말은 삼갔다. 조문객 명단에 이름을 쓰다 보니 언니가 나와 맞아주었다. 그동안 언니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들로 봐서는 모르긴 몰라도 옛날 세대 아버지들이 많이 그러하듯, 그다지 어머니와 자신과 동생에게 살갑지 못했던 아버지로 묘사했던 뉘앙스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늘 나의 비극에 대해선 대처방안이 나름 훌륭했지만 타인의 비극 앞에선 어쩔 줄 몰라서, 오는 동안 약간 감돌던 긴장감은 언니가 만약 너무나 비통한 모습이면 무슨 말을,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그런 난제 때문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태여서인지 이미 오전 한차례 내내 울다 진정한 것인지 언니는 비교적 말간 얼굴이었다.
언니와 함께 고인이 모셔진 곳으로 들어가 영정사진을 얼핏 본 후 절을 한 번 하고 두 번째 절을 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눈물이 훅 차오르고 있었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인데. 언니가 자주 이야기하던 어머니라면 또 모를까. 수년 전 왕래가 거의 없던 둘째 이모부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편의 친아버지 장례식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던 나라서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목례까지 마친 후 언니 쪽으로 돌아서자 언니가 어머니와 남동생, 남편을 소개해주었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누구 친구 엄마께서 여기까지 오셨느냐며 고마워하셨다. 언니와 두 손을 맞잡고 뭔 말을 나누면 진짜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그저 손만 위아래로 흔들흔들하다 꼭 안았다.
"어우 언니, 나 왜 눈물이 나죠? 이제 우리 엄마도 걱정스러운 나이가 다가오고 그래서인가? 남일 같지 않아서인가."
"또 막상 나를 여기서 보니까 눈물이 나나보다. 고마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한마디 덧붙였다.
"나 왜 우는 거야 진짜. 우리 그렇게 엄청 친하지 않잖아요."
그런 말은 전혀 예상 못했는지 온 가족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덕분에 주책맞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다시 집어넣을 수 있었다.
아이 친구가 밥 먹는 자리의 맞은편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학교에서 종종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봤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 앉아서 조용히 함께 밥을 먹으니 새삼 더 귀여워 보였다.
"너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귀엽다."
라고 말하니 아이는 수줍게 웃었다. 예상대로 육개장과 갖가지 반찬들이 차려졌다. 운동을 막 하고 온 터라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적당히 먹는 게 예의라고 배웠기에 꾸역꾸역 골고루 먹었다. 언니는 아이 옆에 앉아 식사를 챙겨주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님이 오면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마침 밥도 다 먹었고 어느 테이블에서 언니가 오래 머물기에 그 쪽으로 다가가서 이제 가겠다고 했다. 언니는 신발장 앞까지 와서 배웅을 하더니 다음에 따로 같이 밥 먹자고 말했다. -우리 그렇게 엄청 친하지 않잖아요-발언 이후, 우연히 만나면 커피나 한잔 하던 사이에서 따로 약속 잡고 밥 먹는 사이까지 발전한 것이다. 고인과도, 언니와도 별다른 추억이 없는 관계로 어찌어찌 사셨으니 좋은 데로 가셨을 거라는 말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다시 한번 언니를 꼭 안으며 등을 쓰담쓰담하고 나왔다. 막상 운전을 하며 나올 때는 아무리 식상한 말이어도 한두 마디 할 걸 그랬나 약간 후회했다. 나는 식상한 말을 듣기 싫어할지라도 남은 그런 말이라도 듣는 편을 선택할지도 몰랐다.
그냥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헛헛하여 자주 다니던 카페에 도착해 길가의 두 차 사이에 겨우 비집고 들어가 평행주차를 막 마치고 나니 귀신같이 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카페 앞이면서 아이에게는 아직 식장이고 이제 나가려는 참이라고, 당연한 듯 거짓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갈까 테이크 아웃할까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거짓말까지 할 일인가 싶어 그냥 월요일에 다시 와야지 생각하며 집으로 갔다. 남편은 또 잠이 들어 있었고 아이는 혼자 방안을 다 장난감으로 잠식시킨 채 놀다 말고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약간 짜증부터 나는 상황이지만 장례식장 조문의 여파로 그러려니 싶었다. 엄마, 남편, 딸, 절친한 이들 몇 명이 언제나 내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하루 종일 감돌았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남편은 안방에 있고 난 거실에서 운동 중이었는데 배달 음식이 도착했는데 벨 안 눌러준 거 갖고 (애가 남편에게 알려줬으니 난 따로 말하지 않은 거고 갑자기 확 일어나기 힘든 동작 중이었음)
"뭐 얼마나 대단한 운동 한다고 가까이 있는 벨 하나를 못 눌러주냐"
고 떠드는 바람에 기분 잡쳤지만,
'그래 여태 계속 그 몸인 네가 속상하지 내가 속상할까'
하며 금세 스스로 기분전환하기도 했다. 가끔 기분 잡치는 남편이지만 살아있음에 감사한 하루. 허나 이 감정 또한 내일 날이 밝으면 날아가리라. 사람은 참 간사해서 시한부 판정과 다름없이 치료 중단까지 겪었으면서도 매사 다시 태어난 듯 감사하던 것도 완치 후 잠깐이었다. 물론 그때 이후로 대박인 삶이 아닌 안온한 삶으로 인생의 전체적인 방향성이 바뀌긴 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성인군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건 네가 성격이 원래 좀 그래서 그래-라고 반박한다면 그 또한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하지는 않겠다. 솔직히 성인군자처럼 살 생각도 없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칭찬도 섣불리 하기 어렵고 흉은 대개 뒤에서 본다. 죽으면 얄짤없다. 잠시의 유예기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죽은 이에 대해 그냥 아예 식탁에 올려두고 이야기한다. 때로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야기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죽기 전의 삶이 어떤 면으로든 훌륭한 축인 거라서 보통의 삶에서는 흔하지 않다. 결국, 자신의 기록을 남겼거나 타인에 의해 기록된 삶을 산 위인이 아닌 이상, 죽은 이들은 점차 잊힌다. 그 어떤 사랑하던 이의 죽음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를 이야기할 때 기절할 만큼 울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 갑자기 내일 죽는다면 엄마와 남편과 아이,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회자하며 이야기할까? 아무래도 더 잘 살아야겠다. 당장은 조금 자신이 없다. 지금보다는 더 괜찮은 나를 기억해 주다가 잊어주기를 바란다.
외할머니는 98세에 경증의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엄마에게는 7남매 중 오빠 둘만 예뻐하고 특히 마흔 넘어 마지막에 낳은 딸인 자신에게 별로 곁을 주지 않은 엄마였다. 게다가 엄마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친정 식구들과 인연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가 나중에서야 다시 만난 거라 결혼한 보통의 여자들이 친정엄마와 맺는 통상적인 원조나 애틋함을 주고받은 정도 없었다. 치매로 노쇠해지고 나서는 나도 투병중일 때라 이모와 외삼촌들만큼 할머니를 길게 모시지 못했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장례식과 그 이후의 한참 동안 외할머니 고유의 삶이나 자신과의 추억에 대한 회자보다는 막판에 자기의 형편 때문에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주로 되뇌었다. 특별히 모질고 악독한 엄마는 아니었지만 살가운 사랑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게 외할머니에 대한 주된 회자였다. 물론 열심히 7남매를 키우셨겠지만 백 년에 가까운 긴 삶에 비해 자식들이 기억하는 모습은 빈약했다.
최근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 백세희 작가가 별세했다. 제목에서부터 주제가 명확히 드러났던 히트작이다. 한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고 해외 출판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도 스테디셀러가 되어서야 읽는 편이라 그때 당시 위시리스트에서 계속 밀려있었고 그렇게 잊혔던 책이다. 읽은 건 아니지만 저자 본인이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 환자로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내담자로서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은 분명히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죽고 싶어도 먹고 싶은 게 하필 많은 음식 중에 귀엽고도 소박한 떡볶이라서 왠지 더 애잔한 그녀였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작가로서도 잘 모르지만 90년생에 불과한 그녀가 많은 이들은 위로해 주고 정작 자신은 결국 떠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어쭙잖게도 애석하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장기적인 유년기의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해리성기억장애를 일 년 이상 겪는 통에 대학을 2년 늦게 입학했고 20대 후반에는 통상 중증질환환자에게 정신과 상담을 연결해 주는 경로를 통해 투병기 동안 주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내담자로서의 기록은 남긴 게 없지만 사실 내가 쓰는 연재글과 따로 집필 중인 장편 소설 모두 그런 경험들이 녹아들어 있다.
-죄송하지만 이제야 당신을 기리는 마음으로 당신의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서 영혼만큼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죽이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다. 삶의 여러 이벤트로 30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나 우울보다는 차라리 분노를 장작 삼고 활활 불타다가 냉소를 끼얹어 진정시키를 반복하며 나름의 균형을 잡고 살아왔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지만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의 삶에 큰 관심이 없어서 질투도 선망도 기대도 없다. 한 면으로는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 속 여주인공 루실처럼 죽고 싶은 생각이 없는 만큼 삶에 대한 깊은 열정이 없기도 하다. 그 순간순간은 즐겁고 충만하려고 하지만 그 이후의 지속가능성이나 의미는 크게 염두하지 않는, 오늘만 사는 여자이기도 하다. 별 생각 자체가 없어서 슬픔도 분노도 후회도 그 무엇도 금세 휘발되고 말아서 대단한 성공과 상당히 거리가 멀지만 비극적 결말과도 거리가 매우 멀다. 결혼 후 11년은 여전히 불의 기질이나 특별히 죽이고 싶지는 않다. 화나게 하는 인간상을 볼 때면 그저,
나의 화근인 아빠도 이제 죽이고 싶지 않다. 이왕이면 빠른 시일내에 죽었다는 부고 소식을 듣고 싶긴 하다. 어딘가에 살아있는 거보단 죽어버리는 게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 상처가 가장 깔끔하게 아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 마땅하기도 하니까.
적어도 나의 죽음은 생애에 비해 빈약하지 않기를, 나를 재밌게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나와 함께한 시간을 즐거웠던 기억으로 떠올리기를, 제법 멋진 구석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흉보다는 칭찬이 아주 조금이나마 많기를, 차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을지라도 이제 죽었으니까 이해해 주기를, 그 정도의 이해는 해줄 수 있는 애정이 있기를. 특별히 죽이고 싶은 인간은 결코 아니었던, 반드시 딸보다 먼저인, 그런 보통의 죽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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