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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엄마 Mar 11. 2019

엄마는 밤마다 노는 중

밤 예찬론자의 일대기

 "하, 오늘부터는 일찍 자자. 어우 너무 힘들다."

 "그러게, 그러자. 나도 오늘 하루 어떻게 버틸지 모르겠네."


 우리 부부는 매일 아침마다 이런 다짐을 하고 밤이 되면 사이좋게 싹 잊어버린다. 나의 평균 취침 시각은 대략 2시 반~3시 반 사이, 남편은 이보다 더 늦다. 나는 초등학생 때에도 밤 12시~1시는 되어야 잠을 자서 엄마의 속을 긁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밤 시간의 마성에 빠져 마치 수련하듯 한 시간 두 시간 야금야금 깨 있는 시간을 연장했다. 웃긴 건, 중학생 때까지는 정말 공부를 하느라 그랬고(다들 판사 될 줄 알았단다. 허허) 막상 진짜 공부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 때는 심야 라디오와 Rock 음악에 심취해 아침이 다 되어 잠깐 자다가 겨우 학교에 갔다. 점심시간이 되어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오후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일을 하다 보니 밤 생활의 역사는 이어졌다. 물론, 술도 오지게 마셨다. 많이 자서 쑥쑥 커야 하는 시기에 잠을 안 자서 키는 평균 이하가 되었고, 공부할 시기에는 잠을 안 자고 딴짓하느라 무엇하나 정점을 찍어보지 못한 좀 안타까운 사람이 되었으니 밤 생활은 나에게 실(失)이 커 보이긴 하다. 습관을 고쳐야겠다 생각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러다 아이를 낳고 나니 육아로 피곤해지면 저절로 아침형 인간이 될 테니 잘됐구나 싶었는데, 18개월 차 내 딸도 12시는 넘어야 잠이 오는 녀석. 내 딸과 우리 부부의 연은 정말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나는 또 밤 시간에 영혼을 바친 채, 이제는 셋이 나란히 아침 10시에 일어난다.


넌 낮에라도 잘 수 있어서 좋겠다. 나가서 공부한다고 설치는 엄마 기다리다 잠든 짱짱이


 아이를 재우고 늦은 샤워를 한 탓에 머리가 아직 젖어 있다. 머리를 좀 더 말린다는 핑계를 대며 노트북을 펴고 앉았다. 피곤하긴 한지 자꾸만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질금질금 나온다. 남편은 웬일로 코를 골며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먼저 잠이 들어버린 남편의 모습은 언제나 짠하면서도 고맙다. 무엇이 고마우냐 묻는다면 첫째는 이렇게 지칠 만큼 열심히 살아주어서 고맙고 둘째는 먼저 잠드는 것으로나마 혼자 만의 시간을 만들어주어서 고맙다.  매일 먼저 잠든다면 외롭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짓들이 죄다 혼자일 때 편한 것들이라 가끔 먼저 잠든 걸 보면 이제 뭘 할까 하며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올라온다. (이상한 짓 안 해요 안 해)


 독서와 글쓰기 외에 새벽에 어두운 조명 아래 나누는 메신저 수다도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때로는 웬만한 책만큼 매력이 있을 뿐 아니라 아이디어나 소재거리를 얻기도 한다. 낮에 오는 메시지들은 집안일이나 공부에 묻히거나 대충 대꾸하는 경우도 많고 상대방도 내가 진지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반면 새벽녘에 오는 메시지는 잔잔한 밤의 수면 위에 띄워진다.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확인하게 되는 밤의 메시지. 밤에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나 밤에 말을 걸어도 되는 사람은 많지 않기에 소중하다.


밤의 메신저는 떨어져 있어도 같이 차 한 잔 하는 느낌이 든다.


 엄마는 며칠 전 통화 중에 이렇게 말했다.

"허구한 날 이 일 저 일 전전한 게 마음이 아팠는데 너 하고 싶은 걸 하고 산다니 좋네."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결혼 이후에야 가능했다. 결혼 후에야 뒤늦게 전공을 살려 일했고, 요즘에는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던 글쓰기도 10년 만에 다시 한다고 하니 엄마는 그 간의 세월이 미안하기도 하고 한 시름 마음이 놓여서 그런 말을 한 듯싶다.


 나는 원래는 세 가족이었지만, 엄마랑 단 둘이 살아온 기간이 더 길다.  대한민국에서 여자 둘이서 살아나가려다 보니 20살부터 일단 '당장 벌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첫 사회생활의 다소 잘 못 끼운 첫 단추는 꽤나 오래도록 바로 껴 맞춰지지 못했다. 뒤늦게 대학을 가긴 했지만 나의 대학 시간표는 '아르바이트 시간 외에 아무 과목'을 욱여넣는 꼴이었다. 다른 애들이 시간표 틈틈이 공강 시간을 가지고 동아리 활동에 재미를 붙이는 것이 부러웠다. 언제나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한 참을 뛰어 나가 버스를 탔고 지하철 환승을 위해 또 달렸다. 공강 시간이나 대학 축제 등 대학생활의 낭만이란 것을 함께할 수 없었기에 대학 친구나 선후배도 거의 없다.


뛰지 않으면 안돼! 여전사 같던 나의 대학생활. 이미지 출처: 포모스

 

 애초부터 아르바이트 때문에 잠이 늘 부족해 자신 없었던 1,2교시 수업들은 지각과 졸음으로 엉망이 됐고 시험기간마저 생계형 아르바이트생인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겨우 한 두 학기 정도,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었던 시기에는 보란 듯이 학점이 좋았다. 그 한 두 번 마저 없었다면 입사 최소 학점 요건도 못 갖출 뻔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서 먹는 김밥처럼 얹히기 일보직전이었다. 토하려 할 때 즈음 졸업이 다가왔다.


 대학 졸업 무렵, 엄마와 나의 생활도 한시름 놓는가 보다 싶었는데 병마가 찾아왔다. 일단 좀 많이, 어이가 없었다. 언젠가 엄마가 점집에서 내 팔자가 '유년기에 평생 할 고생을 다 하는 팔자'라고 했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집 정말 용하다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 부작용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토하고 쓰러지고 몸속 전체에 벌레가 날아다니는 듯한 괴상한 통증에 몸부림치는 그게 이제 내 일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컨디션이 괜찮으면, 갑자기 '오늘 나오지 말고 쉬어.'라는 연락을 받은 직원처럼 당황스럽기도 했다. 뭘 해야 하나. 친구도 연인도 다 떠난 이 마당에?


 낮에는 치료로 마구 털리고 나서 지쳐 잠들거나 내 꼴이 눈부신 햇살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어버리기 일수였다. 당연히 밤만 되면 잠이 오지 않았고 그렇게 또 나의 밤 생활의 역사는 이어졌다. 원래도 책을 좋아했지만 투병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책을 읽은 것 같다. 그런데 부작용으로 뇌세포마저 파괴된 모양인지 기억에 남은 책이 없다. 그래도 뭐라도 남았겠지. 막연한 자기 위로를 해볼 뿐이다.


 투병 기간의 중반부에 접어드니 동동거리며 아르바이트 안 해서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엄마와 둘이 살면서는 잠깐이라도 일 안 하고 있어도 되는 명분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투병기라고? 그만한 좋은 명분은 없었다. 구직을 위해 준비기간이 필요한 소위 좀 괜찮은 일자리 같은 건 아예 접고 살아야 했다. 언제나 그저 현재 가진 능력으로 바로 구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표류했다. 그 흔한 스펙 쌓기를 위한 여러 학원들, 엄마한테는 '나는 굳이 필요 없어.'라고 말했지만 사실 뭐라도 대비를 할 수 있었다면 난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고개를 내밀었다.


이 놈의 집 구석 ! 엉엉 정말 지친다구요. 젠장!   이미지 출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가까이 살던 이모부는 오로지 구직 준비에만 매진하며 몇 년간 아르바이트를 일절 안 하는 자기 아들을 한심해하며 나를 한 껏 칭찬하셨다.  드라마 대장금 대사가 떠오른다. 홍시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할 뿐이라 하던 한 소녀. 그저 이럴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인데 어쩜 이렇게 사냐고 칭찬을 들으니 짜증이 났다. '칭찬 같은 거 안 받아도 되니까 하루라도 쉬고 싶어요. 이모부 아들처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단하다, 멋지다, 장하다 이런 류의 말들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경험해서인지 청소년 복지 분야에서 일할 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칭찬하기 전에는 많은 생각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20대 중반, 한창 꼬일 때로 꼬였던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그때의 나는 칭찬받을 만했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짜증이 막 나지? 이미지 출처 : 위키트리

 

 도망치듯 아빠에게서 벗어나기까지의 험난한 유년기도, 모녀가정의 처절한 삶도 모자라서 이제는 브로콜리 너마저도 아니고 병마 너마저 오다니(브로콜리 너마저: 2007년 데뷔한 4인조 밴드. 따라서 이 문장 이해하는 사람 최소 30대 중반 이상)... 난 지쳐있었다. 희망적인 미래나 꿈이란 것을 그려볼 틈이 없었다. 부작용으로 백혈구가 너무 많이 파괴되어 얼마 안 남은 어느 날 주치의는 말했다. '치료를 더 할지 말 지 선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웬일로 나답지 않은 해보자는 결정을 했고 마침내 투병 1년 4개월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때 내 나이가 29살이었다. 주 수입원이었던 내가 긴 시간 돈벌이를 못하고 병원비만 축내느라 남은 건 빚뿐인데도 엄마는 주치의에게 감사하다며 10만 원짜리 상품권을 내밀었다.


 성격 더러운 젊은 여자애 치료하느라 본인은 소화기내과 전문의인데 신경과, 정신과, 한의학과, 치과 등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애쓴 의사가 있었다. 이유는 뭐 대부분 '얘가 좀 많이 힘들어해서 보조치료가 필요합니다.'였는데, 특히 투병 중임을 알렸음에도 무턱대고 내 사랑니를 발치했다가 사망 직전까지 경험하게 해 준 치과 원장과 대판 싸우던 그 모습이 참 뭉클했다. 치료 중 배가 하도 불룩 올라와서 복수가 찬 것은 아닌지 배 좀 봐달라고 하니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내 배를 눌러가며 한 진단, '음.... 그냥 살이 쪘네요.'라고 말하던 것도 기억난다. 사람들은 큰 대학병원을 들어서면 서늘한 느낌을 받는다는데 난 되려 나름의 추억과 함께 '여기서 어떻게든 해결이 날 것이다.'라는 막연한 의지를 갖는다. 밤이 되면 약 냄새가 좀 잦아든 병동을 걷거나 휴게실에서 책을 읽었던 것, 떠나간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투병기 동안 나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농밀했다.


  내 인생에 없을 것만 같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금도  앞서 말했듯이 거의 3시가 다 되어야 잠을 청한다. 임신기간 동안은 임신을 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 같은 오롯한 기쁨을 느끼며 아무 불안 없이 마음껏 쉬었다.  출산 후 신생아 시절까지는 불안이라는 것이 자라날 틈 없이 그저 일차원적인 욕구불만에 허덕였다. 밥을 좀 먹고 싶었고, 씻고 싶었고, 잠을 조금이라도 자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가 좀 자라고 나니 불안이란 것이 뿌리를 내렸다.

 '둘째 생각도 있는데, 애들 키우고 원래 하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토록 전업주부의 삶이 재미없는데 행복할 수 있을까?'


 남편은 내가 모성애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둘째를 생각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전업주부의 삶에 노상 짜증이 가득하면서도 그 모든 과업을 무척 열심히 하는 것도 신기하다고 했다. 나 역시 신기하다. 이제 대부분 내 딸과 또래 거나 웃도는 아기들은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다. 자기 자식은 어린이집에 보낸 후 민들레 씨앗처럼 폴폴 거리며 약속 장소로 날아온 아기 엄마들은 여전히 유모차에 태운 딸과 함께 나온 나를 보며 물어온다.

 "어린이집 언제 보내게?'

"글쎄 아직은 별로 보낼 생각이 없는데?"

"안 힘들어? 대단하다. 되게 일찍 보낼 줄 알았어."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이것들아.


아기 없이 나온 너희들을 보며 되새기는 말. 이미지 출처 : VODA

 최근 들어 거의 잘 들러보지 않게 된 맘 카페에 들어가 '잠시만 안녕'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계획과 결심의 글을 올리고 응원의 댓글을 몇몇 받았다. 아기 엄마들은 그저 육아 외의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해줬다. 맘 카페라는 이름에 걸맞게 푸념이든 자책이든 자랑이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오구오구 잘한다 하며 편을 들어주곤 하는 맘 카페. 맘 카페에 마음을 의지하며 궁금한 정보를 얻고 친구를 몇 명 만들었고 육아용품을 저렴하게 구매하거나 공짜로 얻기도 했다. 근 2년여간 꽤나 열심히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며 활동했지만 이제는 너무 할 게 많아져서 드문드문 들러볼 것 같다.


 맘 카페에서는 실(失)도 있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터무니없이 낙천적으로 생각했던 나는 맘 카페를 통해 알게 된 어느 언니와의 경험을 통해서 부부의 관계, 남편의 육아 및 살 참여도, 가정 형편 등이 비슷해야만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그 건으로 인해 한 동안 들뜬 마음으로 썸 타던 남자가 느닷없이 잠수 탄 듯 황당한 상태였다. 김건모의 노래처럼 또 다른 내 친구는 내 어깰 두드리며 잊어버리라 했다. 지금은 뭐 돈 빌려준 것도 아니고 괜찮다며 잊어가는 중이다. 잘 못 한 것이 없는데도 문화센터나 마트를 갈 때면 행여 마주칠까 신경 쓰이는 이 우스운 상황. 마주치면 웃어야 하나, 너 좀 이리 와 봐해야 하나. 그나마 최선은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겠지만 알던 사람을 모르는 사람 취급해야 하는 일은 참 불쾌하다. 나 말고도 맘 카페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기에 운영진들은 항상 예민하게 사이트 내를 매의 눈으로 살피느라 바쁜 듯 보였다.


 도 음악도 라디오도 맘 카페도 죄다 걸러지고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는 즐거움은 책과 글이다. 전쟁 같던 대학 생활 중에 단 몇 개월, 잠까지 줄여가며 해볼 각오로 잠시 저널리즘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칼럼 마감 기간이 다가오면 미칠 것만 같았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었다. 잘 쓴다는 말도 제법 들었다. 어디까지나 10년 전의 이야기. 그래서 이제라도 10년 전 그때처럼 글을 쓰고 의견을 나누는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앞으로 격주 주말마다 세미나에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세미나, 글쓰기, 독서, 공부.. 아기 엄마로서 버거울 때가 많겠지만 기꺼이 분투하는 일상으로 맞이하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니 어영부영 흘러가는 일상에서 싹 틔웠던 불안은 사라져 가고 설렘이 보기 좋게 자리 잡았다.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많은 건 아닙니다만....이미지 출처 : 인스타후닷컴

 요즘 많은 사람들이 기어이 잠을 뒤로하고 밤 시간을 보낸다. 그냥 자기는 아까운 사람들, 낮에는 숨어있던 설레는 감정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른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재미보다는 보람으로 사는 건 아닐까? 이 짓도 다 한 때이니 할 수 있을 때 즐겨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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