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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엄마 Mar 07. 2019

여자라서 행복해요?

최은영 <쇼코의 미소>를 읽고

  

 예전엔 장편소설이 아니면 잘 안 읽었는데 최근엔 소설집도 자주 읽고 있다. 소설집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작가의 주제의식과 특색을 한 권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집은 가족, 결혼생활, 사회, 전쟁, 개인사 속에서 멸시당하거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여성의 여러 이야기들을 담았다. 공감하거나 울컥하다가 마지막 장까지 왔다. 행복은 별 거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여자들의 행복은 때때로 불편한 마음을 감수해서라도 고군분투해가며 얻어지기도 한다.


 85년생 대한민국 여성인 나는 살면서 어떠했는지 생각해봤다. 주변에서 나에 대해 대부분 '할 말 다 하는 센 성격.'으로 말하지만 실상은, 별 개의치 않는다는 식으로 넘겨버린 일들이 많을 뿐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부당함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서 방어적으로 망각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랑 딱 몇 마디 나눠보고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하고 돌아서는 감사한 경우도 있긴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다 물고 뜯는 미친 개였던 나는,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고 치열한 조직생활에서 멀어지고부터 제법 훈련된 개가 되었다. 절대 순둥이는 아님에 주의할 .


 요즘 주변에 책 읽는 사람도 적고 문학책을 읽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아기 엄마가 되어 만난 친구들은 죄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필요에 의해 육아 지침서를 읽는 게 거의 전부란다. <쇼코의 미소>는 읽은 사람과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 많은 장점을 가진 책이기에 더욱 그런 점이 아쉬웠다.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내 글을 본다면 그것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아쉬움을 여기서 풀어보고자 한다.  



- 본문 '쇼코의 미소' 중에서 -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중략)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학창 시절 교환학생으로 왔던 일본인 쇼코는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여자아이였다. 외할아버지, 엄마와 함께 셋이서 적막하다 싶게 살아가던 주인공 소유는 쇼코가 한국에 있는 기간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며 급작스럽게 변한 집안 분위기가 약간 어이없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여러 일들을 거치면서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된 쇼코를 보며 주인공은 거부감을 느낀다. 학업성적도 외모도 뛰어났던 쇼코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본 주인공은 쇼코에게서 달아나고 싶다. 본인도 그렇게 꿈도 없이 살아갈 것만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인공 소유는 친구들이 이룬 평범한 삶을 비웃으며 자신이 남다른 삶-꿈꾸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깊은 속내는 이미 영화고 뭐고 다 지쳤고 다 때려치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영화인을 꿈꾼다는 동지들조차 사실, 영화 자체가 꿈이고 목적인 사람들보다는 그저 수단으로 여기고 자기 이름으로 더 크게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싶은 그런 욕망 덩어리란 것을 알게 된다. 자신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잘 풀리지 않았을 뿐이지 진실로 영화인을 꿈꾼다는 생각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나날이 이어진다. 절대 쇼코처럼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만, 참 쉽지 않은 꿈이다. 서로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꽤 다른 삶의 길을 가는 듯 보였던 두 여자들은 결국 다른 접점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 가족은 참 화목하고 언제나 서로 격려해 줘'라고 말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있다면 자기 가족을 본인이 잘 모르는 경우의 확률이 높다. 모든 가정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다 문젯거리를 안고 있다. 가족은 족쇄가 되어 나에게 포기를 강요하기도 하고 최강의 분노 유발 장치가 되기도 한다. '제발 잠 자코라도 있어줘'라고 말하고 싶은 수많은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그런 가족 안에서 여성은 어떤 혼란과 감정을 겪고 성장해나가는지를 담았다.


- 본문 '씬짜오 씬짜오'중에서 -


'그건 그저 구역질 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그 말을 하던 응웬 아줌마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자려고 누운 내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 말을 할 때 아줌마는 우리와 다른 곳에 있었다. (중략)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던 한국 가정과 베트남 가정은 어느 날의 저녁식사 이후로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한국 군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베트남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엄연한 역사(베트남 전쟁(1960-1975))가 있다. 식사 자리에서 순진하고도 무식하게, 한국은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이었고 어느 나라에 상처를 준 적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던 꼬마 주인공의 모습은 지금 우리 한국 안에서도 너무나 많다. 투이(응웬 아줌마의 아들)가 주인공의 말에 반박을 하고, 그에 주인공의 엄마가 사과를 하자 주인공의 아빠가 '왜 당신이 사과를 하냐'며 치고 나온다. 주인공의 아빠는 매우 방어적이고 격앙된 태도를 보이며 한국은 주체가 아니었다고 말한다.(박정희 정부에 의한 강제 차출, 박정희 정부 역시 미국에 의한 반강제 참전 등) 한국 군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기 가족 역시 형을 잃은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제 어른들 싸움으로 번져, 응웬 아줌마와 아빠는 팽팽한 말다툼을 이어 나간다.


 주인공의 엄마가 대신하여하는 거듭되는 사과도, 어떻게든 다시 잘 지내보려고 기를 쓰는 어떤 행동도 그 두 가족을 그날의 저녁식사 전으로 돌려놓지 못한다. 안전한 방식으로 그들은 갈라졌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미워하지만 어른이 되면 굳이 에너지 낭비하지 않고 관계를 정리할 줄 알게 된다.


 절친으로 지내는 일본인과 한국인도 있고 베트남인과 한국인도 있기는 하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의 입장이 잘 보듬어졌거나 아예 피해자 입장에서 전면에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을 경우에 한정된다. 베트남 국민의 한국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과거의 한국인과 현재의 한국인을 아예 다르게 보는 점, 동시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인기의 급부상 등이 인상 깊었다. 그게 다행이란 소리는 절대 아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묵묵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 외에는 무조건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의 아빠처럼, 그리고 일본처럼 자기네들이 먼저 지금의 일본인은 과거의 일본인이 아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며 위안부나 학살 등의 여러 문제들은 그저 명분 있는 과업에 따른 작은 부작용이었던 것처럼 떠들면 안 되지 않을까.



- 본문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중에서 -


 엄마의 생활이 안정되어갈수록 이모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이모가 불편했다. 화장기 없는 푸석푸석한 얼굴, 싸구려 샌들 바깥으로 삐져나온 새끼발가락, 자신 없는 표정과 목소리, 관심의 전부를 아이에게 두고 있는 모습, 안경알에 묻어 있는 눈물 마른 자국, 돈이 부족하면서도 매번 밥을 사주려는 모습, 마치 자기는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태연한 척하는 모습, 형부의 억울함에 대해서 큰 소리로 말도 못 하는 모습. 언니, 언니의 그런 태도는 형부에게 죄가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증명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엄마. 차가운 얼굴의 엄마에게 어떻게든 따뜻한 태도로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네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하는 이모. 어쩌다 서울에 올라와서 땀에 젖은 얼굴로 엄마의 아들을 안고 슬픈 표정으로 그 애를 보던 이모의 얼굴. 그 눈. 죽은 개에 대한 지겨운 레퍼토리. (중략)


 이십 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는 하나 둘 서서히 멀어져 가며 자신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만 남는다. 어떤 관계를 맺을 때 전적으로 나 자신을 던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엄마는 이모의 비참한 삶을 이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진다. 그러나 엄마가, 그리고 우리들이 어른이 되어 유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실상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는 현재의 안전망으로서 필요한 관계들이며 그들과 비슷하게, 괜찮게 보여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신경 쓰고 포장해야 하는 관계들이다. 엄마는 이모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소중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이모를 떨쳐내지 못한다. 이 관계는 너무나 아파서 힘들고 저 관계는 뜨뜻미지근해서 힘든 어른들의 이야기다.


엄마는 이모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소리쳤다.

"항상 이런 건 아니라고. 나, 항상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뒤를 돌아 걸어갔다.

해옥아, 잘 살아.

엄마는 이모의 말을 알아듣고도 못 들은 척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엄마는 엄마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거기에 계속 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해옥아, 잘 살아. 이모는 뭍에 걸린 배를 호수를 밀어내듯이 그 말을 했다.


 내가 불우란 시기를 보내며 친구들에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종종 했던 말이 바로 저 말, '항상 이런 건 아니야.'다. 그렇게 말하다 결국 술을 잔뜩 먹고 어떤 친구에게 '나 사실 맨날 이래. 항상 그래.'라고 말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우리는 안다. 항상 이런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항상 그렇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항상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잘 지내는 것 자체가 왠지 미안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모의 '해옥아, 잘 살아.'라는 그 말속에는 '너무 마음 쓰지 마. 난 괜찮아. 아니 사실 안 괜찮아. 네가 가끔 너무 보고 싶어. 오늘 와줘서 고마워. 오늘 이런 걸 보게 해서 미안해. 다시 못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잘 살아볼게. 너라도 잘 살아. 어서 가'... 그 모든 게 다 담겨있다. 우리들은 살면서 물가에서 내팽겨진채로 길바닥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물고기 같은 누군가를 맞닥뜨릴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일단 나부터 물속에서 버둥거려야 하기에 차마 그 물고기를 물가에 다시 넣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 몸뚱이 하나 헤엄치기도 힘에 부쳐 잃어버린 사람들이 얹힌 듯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눈물 바람일 이야기이다.


- 본문 '먼 곳에서 온 노래'중에서 -


"그러게 말이에요, 형. 우리 학교 여자애들 보셨어요? 계집애들처럼 몰려다니면서 선배 보고 오빠라고 하질 않나. 우리 노래패도 단단하게 이끌어줄 남자애들이 안 들어와서 결국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나도 여자지만 여자애들, 뭉칠 줄도 모르고 도무지 조직이라는 걸 이해 못하잖아요."그 말을 끝낸 기자 선배가 나를 쏘아봤다. "소은이라고 했나?"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도, 우리 후배라면 그런 여성적인 태도는 좀 버려야 할 것 같다? 말투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나도 여자지만, 사회에 나와보면 참 융화가 안 되는 여자들이 많아. 툭하면 삐지고, 불평불만에. 남자들은 안 그러거든. 우리 대학 여자들이 좋다는 게 뭐야. 제3의 성이잖아. 여자지만 다른 여자들의 열등함은 지양해야지. 네 선배니까 말해주는 거지 누가 너한테 이런 말 해주겠니?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 없으면 사회 나가서 욕먹는다, 너."

(중략)

"학번이 무슨 벼슬입니까? 해마다 나타나서 제일 어리고 만만한 여자애 붙잡고서 주정하는 인간도 제 선배입니까? 신경석 씨, 민주주의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이 작은 집단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서야 후련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 운운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차라리 독재가 편할 거야.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솔직히. 씨발, 이 더러운 꼴을 꼭 쟤한테까지 보여야 합니까? 전 이제 그러기 싫어요, 싫습니다."

(중략)

"김연숙 씨나 잘하세요. 여자인 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어요?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 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 여자 후배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안에는 선배도 있고 김연숙도 있다. 난 여대 출신이어서 여자들이 조직적인 활동에 적극적일 확률이 낮다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그런데 그게 이기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선을 긋는 기준이 남성과 여성이 다른 것이다. 단적인 예로, 남편은 새벽 3시에 걸려오는 욕이 섞인 상사의 전화를 다 받아냈다. 남편이 일을 잘못 처리해서 욕을 했어도 새벽 3시라는 점에서 분노가 치밀 판인데 웬 걸, 지가 일을 제대로 못해서 답답해하다가 되려 '잘난 부하'한테 성깔 부리는 식으로 욕을 해서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그 베이비는 얼마 못 가 보기 좋게 잘렸다. 반면 내 전화는 퇴근 후 1시간이 지나면 휴대폰을 '나를 찾지 마세요.' 식으로 무음 모드로 해 두었고, 이 습관은 강제 집순이 엄마의 삶을 사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가끔 시어머니가 일부러 그러냐고 오해하거나 남편이 너는 삐삐를 쓰고 있는 것 같다며 핀잔은 주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일단 대부분의 여성들은(모든 여성은 아니다.) 회사생활 외에도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해서 회사라는 조직이 자신의 전부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은 조직생활 외에 다른 걸 좀 해보라 하면 일단 당황하고 어색해한다. 여기서 남자들은 '우리는 가족 먹여 살릴라고 다 포기하고 사는 거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가족 부양의 책임을 전적으로 또는 많은 비중으로 담당하고 있는 성별이 남성인 것은 사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너희는 왜 그래? 우리처럼 똑같이 해야지'라고 강요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남자는 다 그래', '여자는 다 그래'라고 웃고 넘어가는 게 백 번 현명하다.


 작품 속 김연숙의 말 중 제3의 성을 운운하는 부분에서는 웃음마저 터져 나왔다. 김연숙 같은 여자는 여자로서의 이득, 남자처럼 굴면 생기는 이득 그 양측의 이득만 취하는 모순 덩어리이다. 이런 여자들 때문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소은이는 선배를 선배 이상으로 사랑하게 되고  선배 역시 비슷한 감정으로 소은이를 보살펴준 것으로 그려진 이야기다. 동성애를 두각 시키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노력한다고 변화할 수 없는 태생적인 부분을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예민하게 검열할 필요가 있다. 비단 여성들 뿐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 조직문화를 규정하고 그에 못 따라오면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장애나 여러 요인으로 인한 특수 계층을 대하는 잘못된 행태들은 그 검열이 거의 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다.



- 본문 '비밀'중에서 -


 영숙은 서른둘에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네가 우리 집 대를 끊어놨다."

그 큰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누워 있는 영숙더러 사돈 여자는 할 소리 못할 소리 가리지 않고 말했다.

"다른 집 며느리들은 아들 두셋 잘도 낳던데. 너 같은 게 들어와서."

마음 같아서는 너 죽고 나 죽자고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말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딸 영숙을 위해서, 그 애의 편안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친정엄마가 참아야 한다고 믿었다. 흥분한 사돈을 진정시키려고 사돈 쪽으로 걸어가니 사돈 바로 옆에 지민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얼마 전, 남편의 여자 사람 친구 중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시댁 지역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경상도 권인 것만은 확실한데, 시댁에 가면 여자들 상과 남자들 상이 따로 차려진다고 한다. 자리도 여자들은 부엌 쪽, 남자들은 거실이란다.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란 이런 것들이다. 남편은 나보다 고작 3살이 많을 뿐이며 그 여자 사람 친구의 남편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나의 여자 형제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어떨까? 묘하게 중독되는 앞서 말한 작품 속 선배의 그 말투 그대로 말하고 싶다. '형부, 이렇게 사는 거 아닙니다. 아셨어요? 인간이 평등하다는 거 자체를 이해 못하잖아. 솔직히 **.'이렇게.... 내가 외동인 것은 정말 다행이다.


  작품 속 영숙이는 선배 말투 그대로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럼 새 며느리 얻으시던가요. 저 같은 건 이제 나가겠습니다. 뭐 이 결혼 생활 끝내자 하면 댁의 아드님이 아쉽지 내가 아쉬운 줄 알아요? 전 이제 그러기 싫어요. 싫습니다. 아셨어요?'  

 많은 여성들이 남편이 예쁘면 참을만한 수준을 넘어선 부당함을 그저 견디며 살아간다. 그냥 살겠다는 결정까지는 응원하지만 그 상태 그대로 사는 것은 도저히 응원할 수가 없다.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인데요>의 저자(작가명을 일부러 밝히지 않는다. 저자는 시댁에 작가 활동을 숨기고 살지 모르기에)의 말처럼, '나만 참으면 다 행복해'가 아니라 '나만 빼고 다 행복해'이기 때문에 기꺼이 반기를 들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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