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저 바라볼 때만 좋았다. 신발이 젖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신경 쓰여 비 내리는 날에 밖에 나가는 걸 즐기지 않았다.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비가 그친 뒤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사랑하게 됐다. 그래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만나면 안개에 대한 기대로 일을 하다가도 창가 쪽으로 눈을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면 불필요한 디테일이 사라지고 알맹이만 담긴다. 고등학교 미술부 시절 선배로부터 명암을 파악할 때 쓰면 좋은 방법이라 배웠다.
피어오르는 안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보는 것처럼 주제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블루아워의 하늘과 빛이 어우러졌다.
북악산 팔각정은 화창한 날엔 주차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지만, 안개 낀 날은 그림자도 찾기 힘들다. 나만 아는 행복감이 좋았다. 분무기 흩뿌리듯 내리는 비를 맞으며 35미리 단렌즈를 물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도로 경사면에 고인 빗물을 가르며 제네시스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산길에 비마저 내리는 터라 속도를 낼 리 만무했다. 차가 지나가길 기다려 후미등의 붉은빛을 뿌리며 멀어져 가는 풍경을 담았다. 제네시스의 가로 두줄 리어램프가 이토록 아름답다니! 화룡점정이 따로 없었다.
나는 지금도 비가 내리면 안개를 찾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