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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펭귄 Aug 11. 2022

낭가파르바트의 별

홍보 + 人 5

2007년 난 일생에서 가장 큰 별똥별을 보았습니다. 맑은 밤하늘을 가르며 눈 덮인 산맥으로 내려앉던 유성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2007년 7월, 나는 파키스탄에 있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로 출장을 갔습니다.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낭가파르바트는 해발고도가 8,126m로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입니다. 낭가파르바트는 현지어로 ‘벌거벗은 산’이라 불리지만 파키스탄 고산 포터들은 ‘악마의 산’으로 불립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히말라야산맥은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산과 산이 이어져 바다처럼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멋진 광경을 바라보며 출장길도 멋지게 마무리되기를 바랐습니다. 낭가파르바트의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는 든 것이 좋았습니다.      


해발 4,300미터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까지 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해서 다시 국내선과 승합차를 이용해 1박 2일을 숨 가쁘게 이동해야 했습니다. 수 백 미터 낭떠러지가 있는 좁은 벼랑길을 몇 시간 동안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가슴 졸이며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2박 3일 동안 트레킹을 하고서야 겨우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헬기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고산 경험이 없는 우리 일행들은 적응을 위해 걸어서 올라가야만 합니다.      


트래킹을 하면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등반 첫째 날 호기를 부렸다가 급격한 체력 저하로 낙오가 될뻔했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라’는 경험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묵직한 DSLR 카메라를 챙겨 들고 처음 보는 히말라야의 풍경을 찍으며 산을 올랐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 체력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걸음 옮기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카메라와 나의 배낭을 모두 포터에게 넘기고 나서도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겨우 숙영지에 도착하고 나니 온몸의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상태로는 내일 산행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혼자서 돌아가야 할지, 이곳에 머물면서 동행자들이 일정을 마치고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할지, 좁은 텐트에 누워 수백 가지 경우를 고민했습니다. 다행히도 몸 상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가뿐해졌습니다. 히말라야의 신선한 공기가 몸을 회복시켜줬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일과 인생은 항상 기본을 따라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 다시 트레킹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후에는 나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고산증세로 힘이 들었습니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머리는 지끈거렸습니다. 하지만 웅장한 낭가파르바트산 정상을 가까이서 마주하는 느낌은 고산증의 고충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충분히 만끽하지도 못하고 일행들은 캠프에 등정 소식을 취재하기 위해 바빠졌습니다. 회사가 후원하는 고미영 대장이 낭가파르바트산 정상에 오를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미영 대장은 예정된 시간을 훨씬 지나 저녁 7시를 조금 넘겨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고미영 대장과 등반대원들의 목소리를 건강해 보였다. 예정보다 시간은 늦었지만 나와 취재팀은 등반대를 성공적으로 인터뷰하며 출장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날 밤 등반대원들은 캠프4로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등정 시간이 늦어지면서 모든 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해가 지면서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포터 한 명이 저체온증과 화이트아웃에 걸려 하산은 더욱 지체됐습니다. 밤이 되면서 위성 전화는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8,000m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낭가파르바트 정상 부근에서 움직이는 반짝이는 불빛들이 대원들의 생사를 확인시켜 줬습니다. 불빛이 사라지면 혹시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닌지 불안했고, 다시 불빛이 나타나면 안도했습니다. 대원들은 정상에서 캠프4까지 4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13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했습니다. 대원들은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캠프4에 도착했습니다. 그제야 나와 일행도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대원들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축하 인사를 나눌 일만 남았습니다. 오후 시간은 여유롭게 히말라야 풍경을 만끽했습니다. 베이스캠프 주변을 산책하며 히말라야 산등성으로 내려앉는 석양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을 때 베이스캠프에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고미영 대장의 추락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베이스캠프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하산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었는데 상황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무사하기를 빌었지만,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새벽에 캠프4에 도착한 고미영 대장과 대원들은 휴식을 취하고 원기를 회복한 후 하산했습니다. 고산 등반 경험이 풍부했던 대원들이었기에 모두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캠프3을 거쳐 캠프2에 가까워진 순간 낭가파르바트에 옅게 안개가 꼈습니다. 그 순간 고미영 대장이 미끄러져 1,500m 가파른 설사면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고미영 대장이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위험한 구간에는 조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미영 대장이 추락한 지점도 고정한 줄이 있던 구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원들이 하산하는 길에는 로프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고산 등반의 위험한 코스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로프가 눈에 덮여 보이지 않으면 새로 등반하는 등반대가 로프를 설치합니다. 고미영 대장이 추락한 지점도 완만한 경사 구간이었지만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고미영 대장의 등반대가 하사할 당시에는 로프가 잘린 상태였습니다. 완만한 경사 구간이라 로프를 새로 설치하지 않고 하산했던 것이 고미영 대장의 실수였습니다.      


불과 2년 전, 2005년 7월에도 고미영 대장은 파키스탄 드리피카봉(6,477m) 원정 때 등정을 목전에 둔 지점에서 수 백 미터 절벽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등정했던 일행이 노련하게 로프를 제동했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고미영 대장은 추락의 격을 딛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무사히 등정에 성공한 고미영 대장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추락 당시 절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척추뼈에 금이 갔었다고 합니다.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은 한국에 돌아오고 난 후 몇일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뻐근해 병원에 갔더니 진찰을 한 의사가 고미영 대장의 몸 상태를 진단하고 척추에 금이 간 상태로 어떻게 버텼냐며 놀라워했다고 담당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고미영 대장은 오랜 기간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로 활동하며 다져놓은 허리 근육이 척추를 보호했기에 가능했다고 웃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환하게 웃던 고미영 대장의 모습이 잊히질 않습니다.      


고미영 대장이 낭가파르바트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드리피카봉의 기적을 믿었습니다. 고미영 대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함께 등정했던 등반대원들은 한밤중이 돼서야 슬픈 얼굴로 돌아왔지만, 고미영 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미영 대장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대원들과 일행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원들은 고미영 대장이 추락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을 어떻게 수색할지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회의는 자정 무렵까지 계속됐습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텐트 밖으로 나와 무심한 밤하늘만 바라봤습니다.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있었습니다. 검은색 종이에 흰색 페인트를 점점이 뿌려 놓은 것처럼 하얀 별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을 환히 밝히며 매우 큰 유성이 내려앉았습니다. 그 유성을 본 순간 고미영 대장이 세상에, 히말라야에 작별 인사를 한 것 같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참을 수도 없는 눈물이 한참을 흘렀습니다.      


한국 언론은 고미영 대장의 사고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회사와 연락하며 현장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베이스캠프에 설치한 인터넷과 위성 전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다른 베이스캠프에 설치된 위성 전화를 빌려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와 대한산악연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고미영 대장의 수색을 도왔습니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가 군 헬기를 동원해 수색을 도왔습니다. 히말라야 인근에 있던 등반대원들도 고미영 대장의 수색을 돕기 위해 베이스캠프로 달려왔습니다. 본인들의 등반 일정을 포기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산악인들을 모자 고마움과 산악인들의 의리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고미영 대장은 군 헬기에 탑승한 방송사 카메라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대원들은 헬기를 타고 하강해 고미영 대장을 구조하기로 했지만 현지 기상 상황과 눈사태 등의 위험으로 헬기 구조작전을 수포가 되었습니다. 대원들은 새로 합류한 산악인들과 함께 고미영 대장의 추락지점을 등반하기로 했습니다. 수백 미터의 얼음벽을 타고 올라 고미영 대장을 구조해 다시 하강하는 위험한 계획입니다. 정오가 지나가면 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하기 때문에 오전에 구조활동을 모두 종료해야 하는 긴박한 작전입니다. 자신들의 생명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산악인들은 한치의 두려움 없이 구조를 위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백 미터의 빙벽을 올라 추락지점에 도착했지만, 고미영 대장은 숨진 뒤였습니다. 대원들은 시신을 수습해 하강했습니다. 예상 시간보다 구조 시간이 지체돼 하강하는 길은 위험천만했습니다. 오후가 되며 해빙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하강하는 대원들의 머리 위로 얼음조각과 눈덩이가 수시로 떨어졌습니다. 본인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대원들은 고미영 대장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고미영 대장은 실종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산악인들의 용기와 한국에 있는 후원사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의 언론은 고미영 대장의 사고부터 수색 과정, 그리고 한국에서의 장례 소식까지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대다수 여성 산악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입니다. 일부 언론에서 고미영 대장의 가십거리를 다루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확산하지는 못했습니다. 사고 직후 회사에서 히말라야 현장과 긴밀히 연락하며 현장 상황을 공유했고, 프레스센터를 만들어 매일 상황 브리핑을 통해 언론에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현장과 공유된 사실은 사실대로 설명하고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정보에 대한 취재에 대해서 단호하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고미영 대장의 도전은 히말라야의 별똥별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 히말라야 등정 중 사고를 당한 산악인을 수일 내로 발견하여 고국으로 운구한 경우는 고미영 대장이 처음일 것입니다. 회사는 고미영 대장의 14좌 등정과 죽음을 끝까지 책임졌고, 언론도 그 진정성을 이해하고 회사를 비난하는 기사보다는 사건·사고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때마침 고미영 대장을 취재하기 위한 인원들이 베이스캠프에 있었기에 현장 소식을 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언론 취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낭가파르바트 출장은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사례입니다. 고미영 대장의 낭가파르바트 등정 취재를 위한 출장이  사건·사고 취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현장 취재로 국내 언론들의 오보를 줄일 수 있었지만 현장에 있던 저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는 취재지원을 위한 물리적 기기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베이스캠프의 위성 전화 상태, 전력 지원 가능 여부, 인터넷 사용 여부 등 취재에 대한 제반 시설을 여러 차례 확인했고, 담당 부서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제대로 작동되는 기기는 없었습니다. 베이스캠프 부근에 다른 등반대의 캠프시설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취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홍보전문가들은 일을 기획할 때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의 경우처럼 쉽게 갈 수 없는 현장은 어쩔 수 없지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직접 방문해 주변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중견 건설사가 커뮤니케이션팀을 조직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언론과 소통을 시작한 때의 일입니다. 언론과의 관계도 넓히고 사업도 홍보할 겸 지방 출장을 기획했습니다. 지방 현장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숙소와 단체로 이동할 차량을 예약하는 등 사전 준비를 마쳤습니다. 문제를 지방 사업장 취재를 끝내고 숙소로 이동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현장 직원들이 예약한 숙소는 허름한 여관이었습니다. 호텔이나 고급 펜션을 예상했던 기자들은 낡은 시설에 난감해했고, 커뮤니케이션팀 직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숙소에 당황했습니다. 결국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몇 군데를 배회한 끝에 인근에 있는 괜찮은 숙박시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취재에 동행했던 언론사 기자는 “나름 대기업 계열사 팸투어라 기대하고 갔었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모습을 보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라고 말해줬습니다. 행사를 기획할 때는 직접 방문해 현장을 방문하고 동선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길입니다. 작은 실수가 힘들게 기획한 기업 홍보의 기회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상치 못한 중대 사고가 발생한다면 취재하는 언론인을 위한 기자회견실을 운영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고미영 대장을 지원했던던 코오롱스포츠 사무실 내에 브리핑룸을 설치하고 언론 취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매일 브리핑 시간을 정해 히말라야 현지 상황을 전달했고,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해줬습니다. 브리핑룸 운영은 당시 사고 소식을 보도하는 언론이 부정적인 소식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대한산악연맹은 고미영 대장을 기리기 위해 고미영컵 전국 청소년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주최하고 있습니다. 고미영 대장을 후원했던 코오롱스포츠는 지금도 이 대회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고미영 대장의 위대한 도전은 끝이 났지만, 그녀가 이뤄놓은 업적은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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