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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저 Aug 23. 2023

리듬 속의 그 춤을♬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 리뷰 / 오타쿠일기 7호 백업


오늘의 컨텐츠는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이다. 지금 볼까 나중에 몰아볼까 고민했는데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매일 연재되는 주기 탓인지 (고작 일주일 밖에 안됐지만) 점점 컨텐츠의 시의성을 생각하게 되는데, 첫날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그랬고 오늘의 『마스크걸』이 그렇다. (여하튼 말 많은 놈은 지금 핫한 거에 말을 얹지 않으면 안되는 병이 있기에...)


 『마스크걸』은 공개 되기 전 이미 원작 웹툰과 캐스팅으로 화제였다. 제작발표회 사진도 그랬고, 예고편도 그랬고. 웹툰은 안봤고, 본 사람들은 다들 공개만을 기다리는 분위기길래 슬쩍 들여다보니 재밌어보였다. (이렇게 스릴러를 지나치지 못하는 병까지 얻게 되다.)


 퇴근 후 마스크걸 시청 시작합니다. 라고 비장하게 선언하자마자 친구 하나가 '그 자세로 밤 12시까지 못 움직일걸?' 하는 답을 달았다. 그 정도야, 그래도 난 내일이 있는 어른이니까 적당히 보고 꺼야지. 라고 다짐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게 됐다. 결국 지금 회사에서 병든 닭처럼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오마주처럼 보이는 연출도 있었고 거의 차력쇼와 다름없는 배우들의 연기, 갈등 서사 구조에 대한 흥미로운 점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스포는 없다. 더 나은 리뷰를 쓰고 싶지만 아직 못 본 분들도 있을테니...)


 웹툰 <마스크걸>의 소개 문장은 이렇다. '얼굴은 끝내주게 못생기고, 몸매는 끝내주게 좋은 여자, 김모미'. 솔직히 둘 중 하나라도 가졌으니 다행인거 아닌가 싶었지만(...), 외모 콤플렉스라는건 몸의 단 한 부위만으로도 사람을 갉아먹는게 아닌가. 남들 앞에서 춤추고 자신의 끼를 보여주길 원하지만, 얼굴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게 된 여자. 타인에게 박수와 사랑을 받기 위해 인터넷 방송 BJ로 투잡을 뛰게 된 여자.     


 그는 팬이 많다. 후원을 많이 해주는 사람도, 응원과 격려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낮에는 남초직장의 김모미 대리로 타박을 받으며 일을 하는 한편, 밤에는 마스크를 쓰고 꽤나 에로틱한 라이브 방송을 선보인다. '김모미 대리'의 짝사랑과 삶은 형편 없어도, '마스크걸'의 삶은 비교적 화려하다. 적어도 그곳에서 만큼은 초라하고 못생긴 '김모미 대리'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뉴스, 라디오, 공중파같은 매체가 아닌 '뉴 미디어'의 시작. '막 뜨기 시작한' 인터넷 방송의 시대다. 아이폰3GS가 막 출시됐고 데스크탑 컴퓨터를 열어야만 너머의 타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던 시대. 익명과 가상의 세계에서 사랑받기를 택한 김모미의 삶에는 분명한 현대상이 있다. 


내가 나로 살 수 없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마스크걸'의 비극은 끝내 김모미와 마스크걸이 분리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못생기고, 마스크를 끼고, 얼굴을 뜯어 고치고, 그것 때문에 삶이 망가져도 김모미는 김모미다. 이름과 얼굴을 바꾸어가며 정체성을 갈아 끼워도 마스크걸의 '실체'는 끝끝내 김모미다.  


  나머지 인물은 또 어떤가. 변태 히키코모리의 전형을 띠는 주오남 역시 존재감 없었던 주오남이라는 실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박 팀장은? 아름 씨는? (그래도 그나마 남 신경 쓰지 않고 동시에 나에 매몰되지도 않고 제 정신으로 살아가는건 상순씨 정도다.) 


  드라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등장인물의 책상에 거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별 수 없이 거울이나 카메라를 통해 또 다른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공유하면서 나는 '나'의 페르소나에 점점 도취한다.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나, 인정을 받는 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점점 '보여지는 주체'가 된다. 


 페르소나의 시대는 한층 더 강해졌다. 단지 보여짐에 취할 뿐만아니라 더 많이 보여질수록 자본이 되고 시장가치는 올라간다. 자기관리를 하다 못해 '나'를 판매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결점없이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현대에 내가 나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여러 개로 보여지는 주체로서 조각나 있는 나, 타인이 아닌 진정 내가 보는 나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이제 헛된 꿈에 불과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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