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댕경 May 12. 2021

좋아하겠습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못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거 좀 끈덕지게 해 보면 안 되냐-고 옆에서 수없이 핀잔을 줘도 쉽게 손을 놓아버리는 사람. 이걸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한 가지 음식만 먹는 건데 너는 그럴 수 있냐며 따지고선 휙 돌아서버리는 사람.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질린다나 뭐라나. 분명 그 일에 소질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만 더 하면 금방 실력이 좋아질 텐데, 다른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로 들릴 말을 잘도 하면서 그새 새로운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훌쩍 떠나버리는 사람. 부끄럽지만, 사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에 공부를 할 때면 수시로 공부 과목을 바꿔서 공부하곤 했다. 이렇게 공부하면 효율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공부하고 있던 그 과목에 너무 질려서. 대학 졸업 이후에 취미로 그림을 배우러 다닐 때도 그랬다. 몇 개월 다니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고 지루해지는 순간이 왔다. 그 기분을 느낀 날 바로 학원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뭐든 쉽게 질려하던 내가 어릴 때 깊게 몰입했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해리포터 시리즈’였다. 당시 나는 책의 ‘ㅊ’도 읽기 싫어하는, 노는 게 제일 좋았던 흔한 중학생이었다. 하루는 하도 책을 읽지 않아 걱정하던 울 엄마가 ‘너는 이런 책이라도 좀 읽어라.’라고 하시며 책을 한 권 사 오셨는데, 그 책이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상권)’이었다. (요즘은 1, 2권이라고 써서 출간되지만 라떼는 상, 하권이었다 이 말입니다.) 뭐 책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애도 아니고 이런 책을 읽으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사 왔으니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쳐 들었다. 아니 근데, 별 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던 책이 왜 이렇게 재미있어? 읽다 보니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가 안 돼서 찾아봤더니, 시리즈 1권을 건너뛰고 읽고 있었던 거였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비밀의 방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번째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엄마는 그냥 이게 베스트셀러길래 무작정 한 권 사 오신 것이었고. 우연히 해리포터 책을 접하게 된 그때부터 나의 해리포터 덕질이 시작되었다.


엄마 이거 2권이잖아! 1권부터 읽어야 무슨 내용인지 알지! 나 1권도 사주세요!!!


인터넷으로 책 주문을 해놓고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책이 도착한 날에는 택배박스를 뜯고, 그 자리에 바로 앉아서 시리즈 전부를 독파했다. 원래 글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책 한 권을 읽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시리즈가 출간되기까지 몇 달, 몇 년을 손꼽아 기다렸고, 항상 새로운 시리즈를 예약 구매해서 읽었다. 해리포터라는 주인공이 너무 좋아서 같은 시리즈를 10번은 넘게 읽었고, 오죽 많이 읽었으면 다 너덜너덜해져서 책이 낱장으로 분해돼버리기도 했다. 원서로 읽으면 더 생생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한테 원서도 사달라고 말했다. 시리즈 1권은 영단어 사전 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가면 갈수록 단어가 어려워져서 옆에 사전을 펼쳐 놓고 원서를 읽기도 했다. 물론 그 페이지에서 어떤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는지 전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단어를 몰라도 읽는데 크게 지장은 없었지만, 더 정확한 뜻이 궁금해서 사전을 항상 찾아보았다. 결국 마지막 시리즈까지 원서로 다 독파하였다.


그 시절 내가 해리포터를 좋아했던 때를 돌이켜보니, 결국 쉽게 질려하던 나를 바꾼 힘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중, 고등학생 시절 시험공부를 할 때, ‘수학’만큼은 하루 종일 공부해도 전혀 힘들지가 않았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만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며칠을 고민해서 끝내 그 문제를 풀어내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캘리그라피를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고, 그 글씨를 내가 애정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마이크를 손에 쥔 채 노래를 하고, 악기들을 연주하고, 다양한 음악 장르에 관심을 갖고 듣는 것도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면 뭐든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선 ‘왜 나는 끈기가 없을까. 무언가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해내지 못할까.’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워한다. 그리고 다른 능력 있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한없이 우울함 속으로 파고든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을 보면 정답을 알 수 있었는데. 그냥 좋아하는 걸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러니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좋아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