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묵직한 한국 고전에 발레 한 스푼의 싱그러움
심청전
장님인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세상을 감동하게 해 장님의 눈을 뜨게 만드는 이야기
심청이는 탄생과 동시에 어머니를 보내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게 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일거리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구걸해 얻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심청은 소녀 가장으로서 생계를 이어 나간다.
그러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뜨게 해준다는 스님의 말씀에 혹해 결국 삼백 석을 보수로 주는 일을 택해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되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 심청이에 대한 이야기다. 바닷속 세계 용왕님을 뵙고 지극한 효에 감동해 다시 현실 세계로 올라오게 되는 그녀는 결국 아버지와 장님들의 눈을 모두 뜨게 만든다.
어릴 때는 그저 정성으로 아비를 모시는 심청이의 마음이 멋지고 모두가 착하게 사니 눈도 뜨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음에 교훈의 이야기로 기억했다. 지금 심청전을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스님의 거짓말 때문에 심청이 굉장히 스펙타클하게 고생하며 더 재밌어지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한국 고전 작품이다 보니 배경이 대부분 한국 전통적이다. 초가집 앞 흙 마당에서 함께 날아오르기도 하고, 고풍스러운 궁에서 달빛을 조명 삼아 춤을 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친근하고도 오래된 장소에서 내가 낯설게 느끼는 발레를 행한다. 그를 통해 심청의 마음을,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받는다. 이질적인 분위기의 대상들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졌을 때 새로운 자극이 느껴진다. 우리의 것과 먼, 어쩌면 대척점에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 함께 섞인다.
우리의 이야기인 심청전은 보통 판소리로 기억되거나 그저 학창 시절 짧게 지나간 효에 대한 고전 소설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래서 더 와닿지 않는, 이미 오래전 퇴색되어 버린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고 나 또한 그에 속했다.
하지만 공연은 고리타분하게 다가올 만한 심청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 공연을 보면서 전혀 깨닫지 못한 사실도 이와 동일선상이다. 대사 한 마디 없는 발레 공연의 소재가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작자 미상의 고전 작품을 말이 아닌 무용으로, 표정으로, 마음으로 지금까지 수만 명의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말보다 강력한 예술 장르의 힘이 어느 때보다 와닿은 순간이다.
심 봉사네 집, 마을, 바다의 파도 위, 바닷속 용궁, 한국의 궁궐까지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하는 배경과 전개를 우리 조상은 판소리로 맛깔나게 소화해 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의 예술가들은 무언의 발레로 소화해 냈다. 판소리로 내려오던 고전을 발레로 표현하고자 시도한 자체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2시간 남짓의 공연,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지 보는 재미도 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어떤 대사를 표현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보기도 하고, 혹은 극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몸, 흐름에 놀라면서 어릴 때의 순정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때 묻지 않은 몸놀림으로 날아오르는 그들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함께 날아올라 가는 기분이 든다.
무용수들의 발끝에서 시작되는 싱그러움으로 심청전은 더욱 경쾌해졌으며 심청의 진심을 극대화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을 보고 결심했다. 발레를 배워보자. 일상의 즐거움과 변화를 선사하는 공연이라는 평보다 더한 찬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은 나에게 신선한 변화와 용기를 선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