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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준 Jan 20. 2024

《현대사 몽타주》 서평

지난 세기의 초상

인류의 역사가 발전의 역사였다고는 단언하기 힘들지만, 분명 점점 복잡해지고는 있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더더욱 복잡해지기에, 다른 시대보다도 하나의 분명한 이미지를 잡아내기 어렵다. 이런 모습일 것 같기도, 아니면 저런 모습일 것 같기도 하다.
역사를 막 배우던 무렵엔 겁이 없고 자신만만했는지 마치 고금의 역사에 통달한 듯 거침없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단칼에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를 전공으로 삼고, 아예 업으로 삼은 뒤에는 역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다. 배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몰랐거나 잘못 알았음을 깨닫는 것인 만큼.
또한 그것은 우리가 다루는 역사라는 교과가 불투명하고 불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역사란 과거 삶의 진실한 모습이라기보단, 추측과 진실, 혹은 추측들끼리, 혹은 진실들끼리 맞서는 그 사이의 무엇일까. 온갖 과거의 가능성들 속에서 우리가 짜맞춘 가장 그럴 듯한 것을 ‘몽타주’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 이 책 『현대사 몽타주』(이하 ‘책’이라 부름) 또한 20세기 서양 현대사를 다룬, 하나의 몽타주 작업이다.
저자가 현대사를 ‘장기 폭력사(p.10)’로 규정한 만큼, 전체적인 내용은 전쟁을 비롯한 폭력의 실상과 성격, 그리고 이에 맞섰던 투쟁들과 전망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포착한 ‘폭력’이란 강자, 즉 강대국, 권력자, 남성 등이  약자. 즉 약소국, 민중, 여성 등에게 저지른 것이었다. 현대사는 폭력이 휘둘러져 어두웠고, 폭력에 맞섰기에 밝았다.

해방은 마치 강도처럼 찾아오고
책을 읽는 가장 큰 기쁨은 새로운 것을 알고 느낄 때가 아닐까. 물론 마냥 기뻐하기엔 그 내용이 무겁고 어둡기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서양 현대사의 몇몇 통설들을 뒤집고 서양 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1차 대전의 책임은 독일만이 아닌 당시 유럽 열강 정치가들에게도 있었음을 지적하기도 하며, 특히나 나치 독일 패망 이후의 ‘해방’ 서사,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뒤집는 이야기는 여러 선생님들에게도 소개하고 싶다.
광범위하고 처절한 폭력을 행했던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 승리한 연합국 군대는 과연 ‘해방자’로 찾아왔을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는 과연 멋진 탱크를 몰고 미 육군이 수용소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그 영화처럼 유럽의 민중들을 해방하러 온 것만은 아니었다. 또다른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2008)에서 묘사되듯이, 다수의 연합군은 되려 자신들의 성욕을 해방했고, 최소 86만명에 이르는 독일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해방을 요구하는 식민지 알제리에 새로이 폭력을 일삼았다.
역사적 용어는 어떤 가치관을 강요하기도 한다. 연합국은 나치 독일에 승리했고, 이를 ‘해방’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용어를 규정한다면 여기엔 억압과 폭력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대신 자유와 평화만이 보이기 쉽다. 그렇다면 그 해방은 어디까지 누릴 수 있었는가. 패전국의 여성들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승전국 식민지의 민중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한번쯤은 ‘해방’ 서사를 뒤집어 볼 일이다.

너무도 평범하지 않은, ‘악의 평범성’
한편, 뜻밖에도 이번 임용 시험에서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출제되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절멸 계획의 담당자였고 패전 뒤 이스라엘 정보부에 납치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남다르게 사악했던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평범했던 사람이었다고 보고, ‘악의 평범성’이란 화두를 던졌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정치 폭력을 행했던 무수한 인물들이 있었던 만큼, 우리는 여전히 아이히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아이히만을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에서, 독일 여인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결코 영혼 없이 수동적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념을 갖고 능동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음이 새로운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아렌트가 기발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아이히만을 변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아이히만의 행위는 결국 히틀러 등 수뇌부를 탓하며 자신들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행위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전두환 등 국가폭력의 수괴들을 단죄하는 것 자체도 온갖 방해를 받다 보니, 현장에서 직접 폭력을 저지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크게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철저히 익명성에 감춰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폭력을 막고자 한다면, ‘악의 평범성’ 뒤에 숨은 아이히만이나 점령지 독일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다수의 연합군과 마찬가지였던 현장의 직접 가해자들을 이제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들 모두는 영화 <박하사탕>(2000)에서 얼떨결에 소녀를 쏘아 죽인 계엄군 영호가 아니었다. 영혼도 있었고, 신념도 가진 그저 인간이었다.

그러나, ‘선의 평범성’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제 정신으로 악을 저지른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더욱 강조했던 이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절멸 계획에 맞섰던 의인들과, 2차대전 후 평화를 세우고자 노력했던 정치가들이었다. 특히나 의인들 중에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하층에 속하는 이들로 비범한 용기를 발휘한 이들도 있었는데, 저자는 이를 ‘선의 평범성’이라 규정한다. 그 선의 평범성의 비밀을 저자가 공개하고 있어, 지면을 일단 빌려버린 이상 공유하고 싶다.

‘약삭빠르지 않고 고지식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스스로 체화한 인간적 도리와 사회적 원칙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이 주로 의인이었다(p.172)’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이 악한 시대와 정권과는 별개로 선한 영혼과 신념을 가질 수 있으며, 나아가 역사의 행위자는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것과, 그로 인해 역사 또한 정의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책은 마치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현대사의 전개 과정과 같이 서술된 듯하다.

통합과 통일을 준비하며
책은 또한 서양 현대사의 중요 국면으로 동서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한반도 통일 내지 통합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박노자가 한국 사회를 비판할 때 종종 ‘옛 소련의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옛 소련의 정치 체제를 그리워한다기보단, 민중들이 공유해 온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독일 통일 후 옛 동독 지역에서 일어났다. ‘오스탈기(동독에 대한 향수)’라는 것으로, 옛 동독인들이 소외되면서 점차 형성한 집단 정체성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호등 아저씨’ 구출 운동이 있었다. 옛 동독 지역에선 ‘신호등 아저씨’라 불리는 독특한 횡단보도 신호등을 사용했는데, 통일 후 독일 연방은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신호등 아저씨’를 서독식으로 교체하려 했다. 당연히 옛 동독인들은 반발했고, 마침내 ‘신호등 아저씨’를 지켰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통일 과정, 혹은 통일 이후 우리의 자세에 관해서도 시사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옛 동독인들 못지 않게 북한 주민들 또한 나름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남한-합리적, 북한-비합리적이라는 이분법으로 바라보았다. 북한 주민의 이미지는 여전히 김일성이나 김정일 등 그 지도자들의 죽음에 통곡하는 평양 주민들이나, 식량을 구하러 처참한 몰골로 유랑하는 지방 주민들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편이다. 가장 나은 이미지라고 해 봐야 몰래 남한의 대중문화를 즐기는 북한의 신세대들로, 우리 쪽에서는 상당히 얕잡아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어느 정도 소외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며, 이 때 ‘오스탈기’와 같은 현상 또한 충분히 나타나리라 생각된다. 독일의 경우엔 극단적 대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의 경우는 독일과는 다를 것이다. 남북한은 거의 완전히 단절된 채로 분단을 이어 왔다. 현재도 통일 문제는 정부의 통일 정책에 대한 찬반이나 대안 제시라는 정치 수준에 머물러 있고, 남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어울려야 할 것인지는 크게 다뤄지지 못했다. 그 불안함과 가능성을 책을 통해 모색하게 된다.

민주시민교육과 역사교육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의 관점에서 역사교육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평화이다. 비록 본문에서는 전쟁이 자주 오르내렸으나 결국에는 평화를 가리키고 있다. 이는 요즘 교육과정에서 강조되는 민주시민교육과도 방향을 나란히 하고 있다. 역사교육계 역시 민주시민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현재의 민주시민교육이 민주주의 및 통일, 평화 문제에 집중하는 만큼, ‘통합사회’ 과목을 기반으로 다른 사회 교과, 윤리과와의 통합 움직임도 점점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과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민주시민교육을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이러한 동향 속에 역사과가 본래의 특성을 잃지는 않을까 다소 우려된다.
당장 역사과와 관련해서는 ‘사이비역사학’은 물론 동북아시아 각국의 역사 왜곡 문제가 걸려 있고, 미디어의 팽창에 따른 가짜 뉴스 또한 민주시민 사회를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에서 역사과야말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교육과정에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역사과는 사료 비판을 강조하면서 다른 공교육 과목과는 달리 유일하게 사실의 진위 여부를 중요하게 다뤄 왔다. 사료를 바탕으로, 진실을 탐색하는 교과로서 역사교육과정이 재편된다면, 역사과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민주시민교육 또한 강화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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