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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석 Mar 20. 2019

발화發花되는 폴라로이드, 발화發話성 삶에 대한 인식론

Memento 2000 / Christopher Nolan


First Step,

-5W <Why What Where When Who>





폴라로이드 사진기는 셔터를 누르는 동시에 렌즈가 지향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기록한다. 본체에 장착된 필름지에 즉석으로 인화가 이루어지고, 30초에서 1분이 지나면 피사체의 색깔이 점점 선명해진다. 이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치 꽃이 발화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만 같은 설렘을 느끼게 된다.

과거의 철학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에 집중했다. 현상은 가변적인 것, 환상과도 같은 거짓된 진실이었다. 반면, 현상학은 현상 그 자체를 중시했다. 본질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속에 내재된 것으로 본 것이다.


현상은 우리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것(Erscheinung)이며
의식이라는 것은 항상 무언가를 향해(von Etwas) 있는 것이다.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이자, 하이데거, 샤르트르의 계보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의 기초가 되기도 했던 현상학파의 창립자 후설은 우리 인식의 원천은 직관이라고 했다. 의식은 깨어있는 한 항상 어떤 것을 지향하며, 이러한 의식의 지향성은 의식 자체에 근원적으로 제공되는 직관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험조사관이었던 레너드, 그의 아내는 자택에 침입한 강도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레너드는 단기기억손실증이라는 심리적 병을 앓게 된다. 레너드가 믿었던 세계의 본질이 파괴되고, 삶의 연속성은 폴라로이드의 즉석카메라처럼 단발성으로 무너진다. 심리적 원인이라는 이유로 레너드의 병명은 외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이에 동화되어버린 아내의 극단적 실험으로 인해 레너드는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파국의 당사자가 된다.

 

극중 레너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은 기억한다. 그 이유는 바로 레너드가 현상학 기초 개념 중 하나인 의식의 지향성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단기기억손실증이라는 병명을 가진 레너드에게 인식되는 세상은 10분이라는 시간에 의해 국한된다. 그가 기억을 잃고 백지와도 같은 상태가 될 때마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을 기록해야 했으며, 이러한 기록을 통해 어제보다 한발자국 나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것이다. 10분 단기기억을 통해 인식되는 세상의 실재는 폴라로이드 사진기의 즉시적인 현상으로 기록되고, 객관적 기록 중에 자신에게 직관적으로 중요한 정보는 선별되어 레너드 스스로의 몸에 새긴 문신으로 기억된다. 단기기억들은 문신이라는 가시화된 텍스트로 축적되어 그의 삶과 10분 단기기억을 지탱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장기기억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이야기는 ‘단 하나의 장기기억’이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존 G가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 단 하나의 절대적 명제는 레너드의 가슴 상단에 좌우가 반대로 문신되어있다. 이 명제는 레너드의 몸에 문신되어있는 수많은 단기기억 텍스트 중에 유일하게 좌우가 바뀌어있다. 다른 문신들이 레너드의 시점이나 레너드를 볼 수 있는 타자의 시점에서 읽히도록 써져있는 반면에, 레너드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존 G가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의 명제는 거울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거울에 대한 프로이트적 집착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사실 놀란의 <메멘토>는 누아르 형식 요소의 대부분을 차용하고 있다. 보험수사관, 기억손실증, 1인칭 보이스 오버.) 거울 속에 비치는 또 다른 자아의 입장, 즉, 레너드가 만들어낸 왜곡된 레너드의 입장에서는 “존 G가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라는 명제가 정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기 위한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감독이 심어놓은 거울에 대한 의도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의 보이스 오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거울이 필요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상기시킬 수 있는. 현재의 나를 알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레너드는 “존 G가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의 명제를 가장 위에 두고, 스스로 절대 풀 수 없는 퍼즐을 만들어낸다. 사건파일을 조작하고, 새미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진실을 그 속에 가둬놓고 합리화한다. 존 에드워드 갬블, 극중 테디라는 이름의 형사와 마약중개상 나탈리는 모두 레너드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캐릭터다. 기록된 Fact에 기인한 레너드의 합리적 추론은 항상 실패로 귀결된다. 그것은 테디와 나탈리와도 같은 신뢰할 수 없는 캐릭터들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10분 단기기억만이 가능한 레너드에게 있어 세계의 타자들은 모두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며, 따라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레너드 자신이다.

 

객관적 사실을 단서로,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는 객관적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안타고니스트와 조력자로 대표되는 나탈리와 테디는 레너드가 마주하게 될 진실로 나아가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일 뿐이다. 레너드의 합리적 추론은 그 끝에서 진실과 수차례 대면했을 것이다. 자신이 아내를 죽였고, 아내를 강간한 진범은 이미 죽었다는 진실을. 진실로 나아가게 만드는 건 기록된 사실을 토대로 한 합리적 추론이다. 하지만 레너드가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실에 다다랐을 때 레너드는 물론, 관객들 역시 굉장한 아이러니와 직면한다. 레너드가 자신이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싶은 것, 그것이 과연 비합리적 추론이라 말할 수 있을까?


레너드는 10분 동안 벌어지는 현상에 집중하고, 그 현상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기록하려 노력한다.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기록하는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억은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현상’과도 같고 기록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본질’과도 같다. 왜곡된 기억은 절대적 기록을 재해석한다. 극중 레너드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다.” 이 말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기억은 해석이며, 기록은 재해석이다.”

 

기억이란 기표가 발화되고 남은 자의적 기의들의 연속이다. 문자로 기록된 사실은 객관적 기표를 내재하고 있지만, 기억이란, 소멸된 기록에 대한 추상적 표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재여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지표는 기념품, 폴라로이드 사진과도 같은 전이된 2차 표상들뿐이다. 놀란은 ‘기억’의 불완전하고 가치지향적인 모습을 조명하는 것은 물론, ‘기록’이 가진 완전하고 가치중립적인 모습에 물음표를 던진다. 객관적 지표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현상이란 우리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것(Erscheinung)이며 의식이라는 것은 항상 무언가를 향해(von Etwas) 있는 것이다.

 

객관적 증거들이 우리에게 인식되기 위해선 지향적 의식이 필요하며, 의식의 시선은 항상 주관성을 내재한다. 발화되는 순간순간을 기록할 수 있다고 해서 이성적이고 절대적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화發話성 삶이란 내뱉어진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삶이다. 진실을 기억하지 않고 재해석하는 삶이며, 거울 속에 비친 왜곡된 현상학적 자아에 믿음을 불어주는 삶이다. 폴라로이드로 대표되는 레너드라는 캐릭터의 실존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뮬라크르와 하이퍼리얼리티가 혼재된 현재의 시대에 걸맞은 방법론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 밖의 세상을 믿어야한다. 내 행동들이 여전히 의미 있다고 나는 믿어야한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은 존재한다는 걸 믿어야 한다. 믿을 수 있을까? 존재하겠지?


이 레너드의 보이스 오버만 보면 ‘세계는 우리에게 드러나는 만큼 존재한다.’ 라는 현상학적 명제에 도전하는 독백이 아닐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레너드는 눈을 감았다 뜨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다시 독백한다.


“그래. 존재하는 군.”


레너드는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현재, 즉, 현상을 믿을 뿐이다.




Second Step,

-1W <How>





<메멘토>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대한 반전영화,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영화로 유명하다. 이것은 모두 복잡한 플롯 덕분이다. 1998년 제작된 놀란의 입봉작 <미행>을 보면 놀란이 왜 그렇게 복잡한 플롯에 집중하는지 그 이유의 단면을 훔쳐볼 수 있다. <미행>은 액자형 구성을 택하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에 기인한 단순한 플래시백을 차용하고 있지는 않다. 크게 현재, 대과거, 과거, 현재 순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현재는 큰 액자, 대과거는 작은 액자, 과거는 현재와 대과거의 중간액자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의 종결은 대과거와 과거가 맞물리고,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며 결말에 이르게 된다. 대과거를 통해 과거가 밝혀지고, 과거로 인해 현재가 밝혀지는 것이다.

 

이것은 놀란의 2010년 히트작 <인셉션>에서 플롯의 역할을 하는 꿈의 3단계와 비슷한 지점이 많다. 1단계 꿈과 꿈속의 꿈, 최종적인 단계 림보. 이것을 3단 액자 구성으로 치환해보면, 1단계 꿈은 현재, 꿈속의 꿈은 과거, 최종 림보 단계는 대과거라 볼 수 있다. 극중 코브와 아내의 맬 이야기가 삽화적 플래시백인 대과거의 역할이고, 꿈속의 꿈은 대과거와 현재를 잇게 만드는 메인 플롯으로서 기능하며, 1단계 꿈은 코브의 믿고 싶은 현재, 왜곡된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메멘토> 역시 이 3단계의 플롯 논리를 명확하게 따라가고 있다. 컬러로 된 씬은 현재인 동시에 역순으로 진행되며, 흑백으로 된 씬은 과거인 동시에 시간순서로 진행된다. 컬러가 과거로 향해 나아가고, 흑백은 현재로 향해 나아가며 최후엔 과거와 현재가 만나면서 서사적 종결을 맞게 된다. 또한, 흑백으로 된 씬(과거) 안에 또 다른 액자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새미 잰킨스에 대한 대과거의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새미 잰킨스에 대한 이야기는 극중 맥거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비평가들이 존재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대로 <미행>과 <인셉션>의 3단 액자 구성의 논리를 따라가자면, 새미 잰킨스의 액자 이야기는 결코 맥거핀으로서 기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셉션>에서 코브와 맬의 숨겨진 이야기(대과거)가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을 이어주는 교각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메멘토>에서도 새미 잰킨스의 이야기(대과거)는 역행하는 현재와 질주하는 과거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교각의 역할을 해낸다.

 

3단 액자 구성의 내러티브적 완결성은 바로 이 교각의 역할에 있다. 다소 복잡할 수 있는 플롯에 풍성하고 다의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둘 수 있는 것은 바로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정, 과거가 반, 대과거는 정과 반을 지탱해주는 논리적 교각 역할을 한다. 또한 지탱하는 동시에 이어주며 자연스레 합이라는 진테제로 종결시킨다.


새미 잰킨스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지만, 한 가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새미 잰킨스라는 캐릭터가 레너드의 현상학적 자아가 숨겨놓은 자기본질의 대과거라는 점이다. 필자는 첫 번째 챕터에서, 레너드가 ‘거울’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좌우가 반대로 문신된 단 한 가지 장기기억이자 절대적 명제가 있다고 했다. 레너드가 현재 현상학적 자아를 살아가는 인물이라면, 거울 속에 있는 레너드는 과거 자신을 대표했던 역사적 기록이자, 본질적이었던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레너드가 자신 몸의 문신을 훑어볼 때마다 찾는 거울. 그 거울 속에 있는 인물이 자기본질의 대과거이며, 그것이 바로 ‘새미 잰킨스’라는 캐릭터의 본질인 것이다.

 

이처럼, 레너드의 현상학적 자아는 자신의 과오라고 할 수 있는 대과거의 자기본질을 ‘새미 잰킨스’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창조해냄으로서 거울 안으로 숨겼다. 그렇다면 현상학적 자아는 왜곡된 것이며, 거짓된 것이고, 바로잡아내야 하는 문제인 것일까?




Last Step,

현상학적 자아로 살아가기





인류사를 통틀어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사과’이며 세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고 한다. 첫째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둘째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탄생시킨 뉴턴의 사과, 마지막으로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다.

 

애플이라는 기업을 21세기를 대표하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해도 반기를 드는 사람은 몇 없을 듯싶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타계한 이후, 2018년 현재까지도 애플사는 여전히 전 세계 글로벌기업의 시가총액 1위를 굳건히 달려 나가고 있다. 애플사의 성공요소에 대해서는 언론이나 도서,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들을 하나씩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단순히 생각해보자. 애플의 가장 큰 성공요건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도 아이폰과 맥북의 이용자이지만, 좀 더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아이폰을 사용하거나, 맥북을 사용하는 필자의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대체로 애플만의 ‘감성’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은 1차적으로 디자인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차적으로는 애플 월드에 편입된 현 상황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니라.

디자인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적 디자인과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적 디자인이 그것이다. 파이널컷과 로직과도 같은 애플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플 전자기기들의 근본적인 디자인 특징은 ‘직관’이라는 단어로 대표된다. 앞서 말한 감성은 바로 직관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한다. 직관적이라는 말은 감각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고, 감성이라는 말은 감각을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록들이 축적된 시대. 자신이 만들어낸 인공지능 기계보다도 합리적 추론을 하지 못하는 시대.

 

21세기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A.I(인공지능)이 대두되는 사회이다. 인공지능은 방대하게 축적된 정보인 Big Data로부터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서, 결과를 예측하는 지능 시스템으로, 1분 1초가 지날 때마다 인간이 예측한 것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인간의 컨트롤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다룬 많은 공상과학영화들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컨트롤되지 않는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일자리가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A.I들에게 뺏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에게는 없는 ‘직관’이 필요하다. 직관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것 저것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한 눈에 내린 판단이다. 직관은 영감과 직결되기도 하는데, 영감이란 ‘신의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느낌.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착상’이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이란 지금까지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스스로 문제 해결의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따라서, 합리적인 추론과 수학적인 문제해결 방식은 압도적으로 뛰어날 수 있다고 해도, 합리적이고 이성적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감이나 직관이 있을 수 없다.

 

이 직관이나 영감이 미래 사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미래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아이큐가 높을수록 세상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수많은 지식 정보가 세상에 공유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정보는 네이버나 구글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큐는 좋지만, 자기 머리만 믿는 독단적인 사람보다는 EQ(Emotional Quoient)-감성지수-가 높을수록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 가면서, 생산성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실제 기업체나 조직체에서도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IQ시대에서 EQ시대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미래학자들은 이러한 IQ, EQ에 이어, 또 다른 획기적인 학설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SQ(Spiritual Quotient)-영성 지수/영적 지능-이다.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기 위한 지능을 표현하는 용어로, 이 지능의 번뜩임을 보여줬던 사례를 2016년, 알파고와 세기의 바둑대결을 벌였던 이세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총 5차례 대국 중, 제 4국, 그 중에서도 신의 한수라 불리는 78수. 그 착수가 신의 한수라 불릴 수 있었던 건, 알파고가 착수할 가능성이 0.007퍼센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세돌이 착수한 그 78수 이후로 알파고가 자체적으로 판단내린 승리 가능성은 70퍼센트에서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세돌의 78수에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한 알파고는 그 후로 악수惡手를 두고, 돌을 던지게 된 것이다.

 

단기기억손실증이란 병명을 가지고 있던 레너드처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단기기억손실증이란 병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1분 1초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과 마주친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정보의 홍수’라는 표현처럼 말이다. 빅 데이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올바른 정보의 취사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문제해결을 위한 정보의 취사선택은 이제 인간의 몫이 아닌 인공지능의 몫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세돌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78수를 두게 된 계기와 이유에 대한 질문에 ‘거기 밖에 둘 수 있는 곳이 없었다.’고 답했다. 이것이 바로 ‘직관’의 다른 표현이다. 합리적인 추론으로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몸과 마음이 기억하는 직관을 통해 착수한 78수,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겠다. <신의 한 수>라고 불리는 이 ‘직관’은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직관을 발휘하기에 좋은 환경도, 그걸 허용하는 세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는 그걸 허용하는 시대이고, 그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레너드가 10분이라는 제한시간 안에 (비록 왜곡되었다하더라도) 직관적인 최선의 선택을 행했던 것처럼, 이세돌이 초읽기에 몰려 착수에 1분이라는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에게는 삶이라는 제한시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제한시간 안에, 합리적인 추론이 불가능할 수도 있고, 어쩌면 합리적으로 판단 내렸을 때 ‘불가능’이란 낱말과 조우할 지도 모른다. 이 ‘불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직관’이고 이 직관을 통해 가능한 삶이 발화發話성 삶이다. 레너드의 10분과 이세돌의 초읽기 1분과도 같이 휘발되는 삶의 시간들을 조명하는 방법론이다. 발화發話성 삶이란 내뱉어진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삶이다. 진실을 기억하지 않고 재해석하는 삶이며, 거울 속에 비친 왜곡된 현상학적 자아에 믿음을 불어주는 삶이다. 폴라로이드로 대표되는 레너드라는 캐릭터의 실존과, 신의 한수 78수로 대표되는 이세돌의 실존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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