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젯에서 발행한 인터넷티켓에는 부다페스트 켈레펠트로 표시되어 있다. 우리가 도착할 때는 부다페스트 델리에서 내렸는데 괜히 잘못 갔다가 기차 놓치면 낭패이므로, 티켓이 시키는 부다페스트 켈레펠트로 볼트 택시를 타고 간다. 잘 생긴 젊은 기사가 시간이 아직 남았으니, 근처 쇼핑타운 들러도 괜찮겠다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기차를 혹시 잘못 탈까 하는 조바심에 역으로 확인하러 갔다. 켈레펠트 역은 델리역보다도 더 허름해 보였다. 플랫폼을 표시하는 정보가 확실치 않아 두세 번 왔다 갔다 했다. 오가는 기차들이 많아서 헷갈릴 수 있었다. 여행 중 운송수단에 관해서는 꼭 미리 확인해봐야 한다. 현지 상황이 늘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엔나행 기차에 올랐다. 3일간의 피로가 몰려와 각자 잠을 청한다.
비엔나 중앙역으로 가서 숙소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구글 지도를 살펴보니 중앙역 전에 내리면 바로 숙소로 향한다. 아무리 지리 공부를 하고 예매하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도 모자란다. 평소 대충대충 어떻게 되겠지라는 얄팍한 생각으로 다녔던 습관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Vienna Meidling역에서 내렸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높은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는 주택가를 지난다. 군데군데 벽에 낙서 혹은 그림이 눈에 띄었다. 뭔가를 그려 넣는 것과 여백을 두는 것은 각기 장점이 있을 것이다. 여백은 여백대로의 아름다움이, 칠해진 것은 칠해진 것 대로의 아름다움이 각기 공존한다.
호텔 바로 옆에 전철역이 있다. 접근성이 좋아 보인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 쉬고 나서 나왔는데 프런트에 레몬수와 신선한 사과 한 바구니가 놓여 있다. 유럽의 사과는 한국의 그것만큼 맛이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달고 신 맛을 제대로 느꼈다. 아삭한 식감속에 느껴지는 사과의 맛, 약간의 시장기를 덜어주는 사과의 맛, 손님들을 위한 배려심에 더 깊어지는 사과의 맛 !!
길 옆 자그마한 공원에 걸쳐놓은 해먹에 잠시 누워 흔들거리며 하늘을 본다.
중력을 벗어나 흔들리는 느낌이 좋다.
비엔나 시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전철길과 차도와 인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상가와 주택가가 잘 정렬되어 있는 길을 지난다. 예술의 도시를 상징하는 벽의 낙서 혹은 작품들이 중심가로 이동하면 할수록 더 많이 보인다. 빈티지 샵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그냥 중고상품 전시점이라고 하기에는 오래된 것들이 있는 잡화점에 들렀다. 구제는 <실용적 중고>, 빈티지는 <이야기를 가진 오래된 물건>이라고 하면, 이 가게는 약간의 빈티지와 대부분의 구제로 구성되어 있다. 큰 딸은 평소 구제 매장에서 싸게 산 옷들을 잘입는다. 고르는 안목도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새 것을 좋아하는 나는 왠지 꺼림칙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매장 안을 둘러보면서 조금씩 흥미를 느낀다. 오래된 옷, 오래된 그림, 오래된 물건들이 각기 말하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듯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갔던 혹은 누군가의 몸을 스쳐지나갔던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옷 그리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래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
물건은 처음 제작되어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데, 이때의 소유는 소비와 사용이라는 가치가 중심이다. 첫 소유자의 사용이 끝난 후, 구제(second-hand) 시장으로 나온다.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기능이 남아 있는 물건은 이전 소유자의 흔적(사용감, 얼룩, 마모, 작은 흠집들....)은 결함이 아니라 이야기의 흔적이기도 하다. 말로 전달되지 않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기능적 물건인 동시에 시간과 이야기를 품은 물건'으로 새롭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삶의 파편을 품고 있는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그 혹은 그녀의 이야기를 계승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구매자는 실용보다 관계성을 사는 것으로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 '이 옷을 입던 이는 누구였을까? 이 물건을 사용하면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소유권의 건너감보다 삶의 연결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의 입장에서는 구제 시장에 놓인 순간부터 임시적 존재가 된다. 그것은 자신을 '발견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잠재적 파트너 상태이다. 소유자는 그것을 발견함으로써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고, 그 물건은 다시 기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음 너무 많이 나갔다.
큰 딸과 아내가 물건을 하나씩 고르고 난 뒤, 스타일리시하게 잘생긴 주인과 물건 값을 흥정하는데 당초 예상과 달리, 쿨하게 깎아줘서 예상했던 거보다 저렴하게 사는 개이득을 누린다. 두 가지 물건 모두 잘 어울린다. 새로운 주인을 만난 물건들이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 같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번만 입어도 낡은 것이 된다. 새것과 낡은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 짧은 순간에도 뭔가 인사이트를 준다는 이 느낌은 여행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평상시에는 이런 걸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