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수 한 잔을 마시며, 몸이 정화되는 듯한 상큼한 느낌을 받는다. 레몬의 상큼함 속에 숨어있는 비타민C와 전해질, 구연산의 알칼리 효과 등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몸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느낌을 받는다. 평상시 이렇게 챙길 수 없으니, 만났을 때 최대한 활용하는 게 삶의 지혜가 아닐까?
거리를 걸어가며 먹는 모닝 사과는 몸을 깨어나게 할 뿐 아니라, 빈속을 살짝 채워줘서 걷기에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었다. 껍질째 먹으면 케르세틴의 항산화 및 노폐물 제거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농약 때문에 깎아서 먹어 버릇해서인지 껍질에서부터 전해지는 사과 특유의 향, 그리고 이 사과가 자라는 동안 받았을 햇빛들을 상상하니 몸에 곧바로 흡수되는 느낌이다.
호텔 옆 마트에 들러, 내일 귀국하기 전 사가지고 갈 것들을 미리 탐색했다. 시장에서 봤을 때와 가격 차이가 거의 없어서 내일 동선이 편안해질 것 같다.
쉔부른 궁전 가는 길에 거리 곳곳에 공연 포스터들이 눈에 띈다. 예술의 도시답게 음악과 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 포스터들이 예쁘다. 예술의 도시에 대한 공연자들의 수요와 그 공연을 즐기러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과 이 도시 사람들이 한데 엉켜 멋진 예술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 빈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Green Day의 포스터를 보며 <21 GUNS>와 <Holiday> 곡을 떠올린다. 음악은 들을 때도 좋지만 시도 때도 없이 그 선율이 떠올라 일상 속에 스며들어오는 그 느낌이 좋다.
쉔부른 궁전을 곧바로 가지 않고 옆의 공원을 지나서 간다. 덩치 큰 나무들과 잔디밭, 반려동물들과 한 때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멍 때리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흐릿했던 날씨가 점점 맑아지고 구름이 높이 올라가면서 사물의 풍경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궁전에 도착했다.
본래 이 지역은 16세기에 황실 소유의 사냥터였으며, “Schönbrunn(아름다운 샘)”이라는 이름은 전설에 따르면 황제 마티아스가 이곳에서 맑은 샘을 발견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궁전은 레오폴트 1세 황제가 17세기말에 여름 궁전으로 짓기 시작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재위 1740~1780)가 바로크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오늘날의 모습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전형적인 오스트리아식 바로크 궁전 건축으로, 외관은 화려하면서도 균형감 있고, 내부는 로코코적 장식미가 두드러진다.
대정원(Große Parterre)은 대칭적으로 설계된 프랑스식 바로크 정원으로, 분수와 조각상, 화단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고, 궁전 정원 끝자락에 위치한 넵튠 분수(Neptunbrunnen)도 볼만하고 전망대인 글로리에 트(Gloriette)가 있어 정원과 빈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낙엽을 밟는 길인데,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있는 게 아니라 푸르고 무성한 나무들과 푸른 잔디밭에 떨어진 낙엽들을 보듬고 있는 듯해서 쓸쓸하지 않다. 2019년 겨울에는 넓기는 했으나, 약간 황량한 느낌이었는데, 지금 이곳은 바로 한 계절 전의 화려한 풍경들을 곳곳에 수놓아 눈이 호강한다. 새싹이 움트는 봄이나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여름은 얼마나 더 멋질지 상상해 본다.
어제와 다른 쾌적한 날씨에 한 나절 제대로 산책을 하고 나서 점심식사를 하러 비엔나 시장으로 향했다. 아 그런데 여기서도 화장실이 문제다. 이번에는 맥주가 아니라, 오랜 시간 걸었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하는데, 여기도 현금을 받는다. 아무도 현금이 없어,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고 각자 볼일을 본 후, 전철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철역에서 패스를 사면서 문득 카드를 인출기에 그대로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세상에, 거리가 100m는 넘어 보이는데 망연자실한 상태로 빠른 걸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큰 딸이 전력질주하면서 쌩 앞으로 치고 나간다. 무릎이 좋지 않아 뛸 수 없는 처지라 잰걸음으로 가는데, 저만치 딸이 미소를 지으며 하얀 카드를 들어 보인다.
어린 시절이 문득 스쳐 지나가며 어느새 부모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에너지를 집중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니 시장기가 제대로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