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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지 해녀삼춘의 물회 선물

by 새로나무


이렇게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한 가게는 처음 만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산일출봉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일출봉 바로 앞바다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일 년에 이렇게 맑은 날씨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나, 최고의 경치를 만난 것만은 분명하다. 저기 잠시 멈춰 선 고깃배와 일출봉의 구도가 완벽하다. 바다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폭의 자연으로 경치에 포함되어 있다.


시리도록 푸른빛은 푸른빛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옅고 짙은 정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서 어떤 물감으로도 그 정확한 색감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끔 사진을 찍다 보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을 100% 반영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늘 느낀다. 지금의 바다의 색감과 물결 그리고 물안개와 저 푸른 제주의 식생들은 사진으로 담기에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 순간을 포착하고 남기려면 사진만 한 것이 없다.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풍경들은 점점 닳아가기 때문이다. 선명하게 남는다고 해도 그 가장자리는 옅어지고 해지게 마련이다.




주문을 받는 삼춘(우리들의 블루스가 가르쳐 준 삼춘, 손위 어른들을 지칭하는 제주만의 표현이 사랑스럽다.) 주문을 받는 삼춘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분들 모두 해녀일을 직접 하는 삼춘들이다. 메뉴판을 보면서 무엇을 선택할지 갈등하는 상황은 언제나 즐겁다. 성게미역국에 눈이 갔다가 물회로도 눈이 간다. 성게미역국은 서로 공유하는 메뉴로 하고, 나도 물회를 한 사발 받아 들기로 한다. 차고 시큼하며 시원한 맛에 아직은 가닿지 못한 것 같은데 그 편견이 오늘 비로소 해소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문한다. 모둠회(멍게, 전복, 소라)라고 되어 있는데 소라 대신 문어를 해줄 수 없느냐고 하니, 왜 안 되겠냐고 쿨하게 주문을 받는 삼춘의 얼굴에 장인의 자존감이 스쳐 지나간다.

성게미역국이 모습을 드러낸다. 싱싱한 미역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파닥파닥함을 벗어버리고 먹기 좋은 식감으로 변모된 모습을 본다. 거기 거울처럼 젊은 시절의 파닥파닥함과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 이제는 조금 사라진 나의 모습을 본다. 큰 그릇에 있을 때의 성게미역국의 표정은 세 사람을 향한 모습이라면, 내 앞접시에 담긴 성게미역국의 표정은 오직 나만을 보고 있어서 더더욱 즐겁다. 보드라운 식감이 치아에 닿는 푹신한 느낌 속에 제주의 맑은 바다가 빚어놓은 예술품을 입안에 머금고 그 날것이 품었을 바다밑 세상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손질이 까다로운 만큼 구수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선사하는 성게를 먹을 때 나는 해녀 삼춘들의 손질과 노동에 빚지고 있음에 깊이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미역국 한 숟갈속에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 빚어낸 삶의 정수가 들어있음을 깨닫는다. 미역국물과 미역이 식도를 지나 위장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편안한 신호 속에 간 밤의 피로는 씻겨 내려간다. 성게미역국이야말로 정답이지…..


가자미 물회, 오징어 물회, 각종 잡어 물회를 맛보았지만, 뭔가 물회의 정수를 맛본 기억은 없다. 성게알과 전복, 소라가 감싸고 있는 비주얼에서부터 설렘 가득하다. 살얼음과 양파와 미역을 뒤섞으면서 이미 입안에 침이 고인다. 침샘을 통해 분비된 침 안의 아밀라아제들이 제대로 소화시켜 주겠다고 다짐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시원하고 구수하며, 고소하고 날 것의 옅은 바닷 비린내 마저 참여하는 이 공감각은 언어의 영역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표현하고자 애쓰는 나의 빈약함과 해녀삼춘들이 빚어놓은 이 빛나는 예술품 사이의 경계사이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물회라는 음식의 표준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알찬 구성이다. 성게알이 고소하고 구수하면서도 옅은 비린 맛을 선사한다면, 전복과 소라는 쫄깃한 신선함을 선사한다. 미역과 양파는 이들이 위를 지나 장에서 안정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장내 미생물의 먹이가 될 수 있도록 자신들을 가다듬는다. 식재료의 완벽한 조화의 매조지는 저 살얼음이 낀 국물이 담당한다.


이 완벽한 물회는 오늘 갑자기 탄생하지 않았다. 오늘 태어난 음식이라면 이렇게 맛있을 리가 없다. 바다가 처음 생성되었을 때부터, 최초의 식물과 단세포 생물이 출현하고 그로부터 억겁의 세월이 흘러 성산일출봉이 생성되고 그 앞바다에서 전복과 소라와 미역과 성게가 처음 세상에 났을 때부터, 오랜 세월 동안 해녀 삼춘들이 물질을 하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만들어 오늘날의 물회가 완성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완벽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문어숙회는 탱글탱글한 부드러움을 선사했다. 씹을 때마다 문어가 누비고 다녔던 바닷속 경로들이 근육 속에 하나씩 심어져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하필 그때 포획되어 나의 입안에 들어와 즐거움을 선사하는 문어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멍게는 그 오묘한 색감이 죽인다. 멍게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듯. 특유의 쌉싸름한 옅은 쓴맛 대신 쌉싸름한 단맛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방울방울 터지는 폭죽처럼 온 입안을 적시며, 신선함이란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익히거나 볶은 전복을 선호하는 나지만 성산일출봉과 푸른빛 바다가 선사하는 이 압도적인 경치 앞에서는 전복회의 쫄깃한 식감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일상을 만들어가는 힘은 나에게서 나오지만, 나를 둘러싼 일상의 생태계속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 힘은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제주는 육지 사람들의 피곤과 피로와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제주가 만든 생태계의 벼리를 느끼게 해 준 해녀 삼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고 가게 문을 나선다.


가게 안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경치를 감상한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정오의 태양열기를 식혀주고, 살랑살랑 바닷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잠시 힐링하고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며 오래도록 이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줄 것 같다. 아니 빛바랜 추억이 아니라 생생한 추억으로 평생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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