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리의 추억
2004년 겨울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며칠 뒤 폭설이 내렸다. 전철로 광나루역에 내렸는데, 가는 차가 없다. 집까지 대략 7km를 걸어갔다. 두 시간 넘게 걸어오던 길가에 오리 꼬치구이집이 있었다. 오리고기에 대한 매력에 가족, 친구들과 후배들 같이 어울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따금 들렀다. 기름기 쫙 빠진 오리고기를 맛있게 먹은 기억만 남아있다. 사라진 지 10년도 넘었다. 이 가게를 아는 사람들 모두 의아해했다.
@2. 오리(五利) 고기?
한국오리협회에서 말하는 오리는 一利(심장)는 불포화지방산이 혈관 내 쌓여 있는 불순물을 배출시켜는 효능, 二利(신장)는 신장염, 배뇨장애 등 신장질환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중기능 증진에도 매우 효과적, 三利(간)는 지친 간을 편하게, 四利(폐)는 기침, 천식, 결핵 등 호흡기 관련 질병예방에 효과적, 五利(위)는 위를 튼튼하게 한다고 했다. 협회의 광고성 멘트를 생각하면 반은 삭감해야 하지만, 예로부터 자식입에 들어간 고기도 빼서 먹을 정도로 좋다고 하니 영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필수 아미노산 8종이 풍부하게 들어있고, 비타민 A와 단백질도 풍부해 체내 병균 저항력을 높이고 세포 재생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단백질 함량이 높아 근육 형성과 회복에 도움을 준다. 불포화지방산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절하고 염증을 완화하는 데 기여한다. 비타민 B군(특히 B6, B12)과 아연, 철분, 셀레늄 같은 미네랄이 풍부하여 빈혈 예방, 에너지 대사, 면역 체계 강화에 도움을 준다. 껍질의 콜라겐은 피부 건강과 관절 건강에 이롭다.
중국에서는 오리고기가 황제의 식탁에 오를 만큼 귀한 음식으로 여겨졌다. 베이징덕(北京烤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다. 일본에서도 오리고기는 고급 요리 재료로 사용되며, 특히 일본전골나 샤부샤부와 같은 전통 요리에 자주 쓰였다. 프랑스 요리의 콩피(Confit)와 같은 고급요리 쓰인다. (손을 담갔을 때 약간 뜨거울 정도의, 즉 고기의 겉 표면에 마이야르 반응의 갈색 크러스트가 생기지 않을 정도의 온도의 기름에 생고기를 푹 담가 놓고, 보통 3시간~3일 정도의 시간 동안 숙성한 뒤 바로 꺼내 고기를 구워내는 방식)
@3. 오리의 재발견
오리고기의 신선도와 맛이 핵심이고, 고기를 둘러싼 음식 생태계가 얼마나 조화롭냐에 따라 오리 맛의 폭과 깊이는 변할 수 있다. 신선한 쌈 채소, 마늘, 양파, 김치와의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온전한 오리 고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이 오리를 둘러싼 채소들의 조합이다. 직접 재배한 밭에서 키운 쌈 채소들을 양껏 먹을 수 있어서 안심했다. 요즘처럼 식재료 가격에 민감한 시기에 추가로 요청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셀프코너 안에는 쌈 채소와 좋아하는 마늘, 절인 양파, 열무김치 등 각종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다. 여기에 부추와 양파를 옅은 간으로 버무린 반찬이 추가로 나온다.
@4. 나만의 방식
쌈 위에 오리 고기 한 점, 마늘과 양파, 부추와 들기름 막국수 몇 가락을 올려놓아 만반의 준비를 한다. 입안에서 한꺼번에 천천히 허물어지는 아삭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을 오래오래 음미한다. 음식을 급히 먹으면 뇌가 포만감을 뒤늦게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먹으면 급하게 먹을 수 없고 천천히 느긋하게 맛에 집중할 수 있다.
Wallace Wattles는 <건강해지는 과학적 방법>에서 "진실로 획득한 배고픔"과 "음식을 먹는 동안 오직 맛에만 집중"할 것을 1910년에 건강의 비결로 제시했다. 저녁 먹는 시간을 8시 이후로 늦춰 공복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처음의 조건은 충족되었다. 다양한 채소와 곁들여 먹으면서 이들을 구별하는 동안 딴생각을 할 틈이 없이 오직 맛에만 집중한다. 상추와 깻잎, 케일과 치커리 모두 아삭함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각기 다른 식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먹는 즐거움에 추가한다.
칼국수와 수육, 냉면과 불고기 등 면과 육류의 조합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베스트셀러들이다. 오리고기의 쫀득함에 부드럽고 고소한 들기름 막국수로 감싸 서로 다른 식감이 입안에서 경쟁구도를 만들어주는 걸로 나의 할 일은 끝이다. 입안의 미각 수용체들이 각각 반응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 동작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흙에 물이 스며들듯이 포만감은 서서히 내 온몸에 옅게 옅게 동심원처럼 퍼진다.
@5. 사이드 메뉴의 발랄함
강원도에서 자라 누구보다 감자를 많이 먹었다고 생각한다. 찐 감자는 물리도록 먹었지만, 여전히 그 고소함의 벼리를 깊이 간직하고 있다. 부모님이 잠시 여행 가신 틈을 이용해 스무 개의 감자를 갈았다가 갈변현상을 보고는 모두 버려 혼났단 기억은 거꾸로 어디를 가나 <감자전> 메뉴가 있으면 무조건 주문해서 그 맛을 보는 습관이 배어있어서 감자전을 주문했다. 감자채볶음과 감자전 사이 새로운 맛의 영역을 본다. 감자전 특유의 찰진 식감을 유지하면서도 결합된 조직은 느슨하여 먹기 편하다.
채소에서 시작해 단백질을 돌아 탄수화물에 이르는 경로에서 혈당스파이크를 일으키지 않는 건강한 식사를 하여 혈관상태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장내 미생물들에게 좋은 먹이를 제공했다는 보람과 가볍고도 옅은 포만감으로 발걸음은 식사전후가 다르지 않아 상쾌하다. 음식을 먹고 나오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즐거움, 그리고 퍼내도 퍼내도 끊임없이 채워지는 맛의 바다의 이미지가 뇌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