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8시에 깨어나며 푹 잔 나를 대견하게 쳐다본다. 잠을 잘 자야 뭐든 할 수 있다. 예민했던 시절 비행기에서도 잠을 잘 못 자고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비몽사몽간에 끌려다녔던 기억이 아련하다. 여행에서는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문지나 음식점을 빼곡히 적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그때그때 상황과 기분에 따라 여행하겠다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어떤 컨셉으로 여행을 하고 잠은 어떻게 자고 시차적응은 어떻게 하고 몸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의 개별적 전술을 잘 짜고 실행해야 기억에 남으면서도 후회 없는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가서 무엇을 할 건지, 어디로 갈 것인지, 뭘 먹을 것인지, 어디서 잠을 잘 것인지를 설계할 때마다 쌓이는 설렘의 순간들은 일상의 피곤과 어려움들을 내려놓는 힘이 있었다. 일정을 마무리하는 고요하고 평안한 아침, 짐을 챙기며 별다른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 이 기분이 좋다. 여행 기간도 적당하고 다녀온 곳도 적당하고 적당히 걷고 적당히 먹고 마셨다. 계획했을 때로부터 거의 10개월 가까이 흐른 것을 보면 어쩌면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비엔나는 다양한 매력을 발산하는 도시였다. 속으로 파고들수록 깊은 내공을 간직한 도시다. 한 때 세상의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고 지금도 그 에너지가 깊이 숨을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는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었다. 3일은 짧은 시간이지만 각 도시의 매력을 들여다보기에 아주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와 거리의 풍경과 먹고 마시며 입안에 남은 잔상, 공원에서 떠드는 목소리들과 가을빛에 물든 도시들 곳곳을 다녔던 발걸음이 새겨진 추억은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할 것이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공통 제안사항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가족여행계를 시작하기로 했다. 겨울이어서 따뜻한 남쪽 유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ㅎㅎㅎㅎ 생각만 해도 즐겁다. 차차 계획을 세워서 서로 건강할 때 많이 여행하자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여행 가기 전 그리고 여행을 마칠 때 가장 어려운 일이 짐 싸는 일인데 오늘은 단 시간에 마무리했다. 남는 시간에 근처 현지식당을 살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곳을 찾았다. 짐을 호텔 보관소에 맡기고 식당으로 향했다. 체크아웃하고 나서는 길가에 처음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보다 더 많은 낙엽들이 흩어져있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다. 짧은 게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긴 시간이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적당한 시간의 흐름만을 느낄 수 있다.
카푸치노와 탄산수만 음료로 주문했더니 약간 의아해한다. 이곳에서는 음식을 안 시키더라도 음료는 각자 하나씩 주문하는 것이 관례처럼 보인다는 대화가 오고 갈 즈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마늘 크림수프는 약간 짰지만 생마늘을 갈아 넣어 진한 맛이 우러나왔고, 누들 수프는 닭고기 수프 맛이 나면서 그동안 구경 못했던 면이 있어 모든 식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한 그릇 더 주문했다. 유럽 대부분의 곳이 마찬가지 일 텐데 각자 주문하는 게 관례여서 수프에 숟가락 하나만 등장한다. 우리가 같이 나눠먹을 거라고 해도 그게 익숙해서 그런지 별도로 요청을 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
샐러드와 가게에서 추천해 준 발칸 그릴 요리와 이번 여행에서 그 존재감을 확인한 파이크 퍼치 요리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자극적이지 않고, 깔끔한 맛을 느끼면서 마치 비엔나에 오래 산 사람처럼 착각했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에너지들이 응축된 음식이다. 낳고 기르고 성장해서 세상에 이바지해 온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이 수프와 샐러드와 요리 곳곳에 숨어있다. 그 숨은 에너지들이 내 몸속에 스며들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큰 딸은 뒤늦게 합류하느라 부다페스트로 돌아가 하룻밤 묵은 뒤 귀국해야 해서 마이들링 역에서 헤어졌다. 여기서 오늘 고난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마이들링 역에서 그냥 비엔나 공항으로 가는 일정을 잡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중앙역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거기서 공항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운 나의 착오였다. 중앙역 가는 BB라는 교통편을 구글 맵에서 찾지 못한 가운데 벨베데레로 가는 62번 트램이 나타나자 그냥 타자고 했다. 그런데 한 정거장 가더니 멈춰 섰다. 다시 마이들링역으로 향한다.
막내딸이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고 대충 해서 무거운 짐 들고 이동하게 하는 게 맞냐고 얘기하자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확히 알아보지 않고 일행을 이끄는 나의 대충대충 습관도 문제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착잡했다. 마이들링 역에서 OBB 기차로 공항 가기로 하고 차표를 예매하는데 여기서도 실랑이가 벌어졌다. 환승 여부를 막내딸이 물어보길래 이거 그냥 가는 거 아니냐고 했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역에서 환승하는 게 맞았다. 중앙역에 도착해서 환승 열차를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플랫폼이 달라 한 대를 놓쳤다. 공항행 열차를 타는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서로 화해의 눈길을 보내며 열차를 타고 비엔나 공항으로 이동한다. 같은 장소가 아니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들을 확인해야 한다. 귀국직전까지 뭔가 가르침을 준다. 기꺼이 받지 뭐.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해프닝이 있었지만 일찍 서두른 덕분에 넉넉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대한항공 카운터를 찾다가 그만 실수로 보안검사 구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양해를 구하고 카운터에 짐 부치고 무사히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시행착오 없이 순탄하게 오다가 마지막날에 제대로 실수를 연발했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확실히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교훈이 최대의 수확이다.
대단한 일을 해낸 느낌,
2주간 경험했던 일들이 장편 영화로 스쳐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즐겁게 돌아가는 기분을 띄워주는
이륙 순간의 아스라한 느낌이 좋다.
지금 여기에서
아까 지나갔던 거기를 생각하고
조금 이따 갈 보금자리를 향하는
그리고 아주 이따가 갈 여행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