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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Feb 25. 2024

맑고 시원한 순댓국 한 그릇

순대만큼 적응하는데 오래 시간이 걸리는 음식이 있을까? 일곱 살 되던 해 살고 있던 도계읍에서 가장 멀리 황지로(오늘날 태백시) 나왔다. 도회지 방문인 셈인데, 아마도 오늘날 수도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선 개념일 것이다. 순대를 안주 삼아 소주를 드시는 와중에 돼지 간 한 점을 챙겨주셨는데 그때 탈이 나고 말았다. 이후 육류를 아예 먹지 못했다. 면이 너무 길어 힘들어했던 냉면의 트라우마에 이어 육류 특히 순대에 관한 트라우마가 발생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예상을 뛰어넘는 기간 지속되었다. 냉면의 트라우마에서 탈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순대는 어쩌면 인생의 숙제 같았다.

순댓국 한 그릇을 마주 대한다. 15시간 간헐적 단식을 한 터라 뭐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었다. 순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낡은 생각을 날려버리고 있는 그대로 음식을 마주 대하기로 했다. 그러자 국물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돼지국밥 국물의 느낌과 유사하다. 수많은 순댓국들을 지나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해결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국물은 맑고 시원하다. 들깨 가루와 마늘로 베이스를 깔아 둬서 돼지 사골 육수의 깊이를 더해준다.


주인장의 솜씨 위에 나만의 스타일로 각색을 하기 시작한다. 마늘을 넣어 바닥으로 잠기도록 하여 익힌다. 푸르고 싱싱한 고추 슬라이스는 국물의 중간 지점에 넣어둬서 맑은 맛에 칼칼함을 더한다. 여기에 피페린의 이점 그리고 상하체 기운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후추를 듬뿍 치고, 싱싱한 새우젓을 살짝 올려 간간함의 높이를 저울질한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미묘한 균형점을 설정해둬야 한다. 지나치면 국 전체를 망치기 때문이다. 새우젓을 오버했다가, 고추를 오버했다가 마늘을 오버했다가 낭패를 겪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넉넉한 머리 고기와 살들은 부산에서 먹었던 청화백 돼지국밥의 가브리살과 항정살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육질이 실하고 고소했다. 한 점씩 접시에 담아 작은 새우 한 마리를 올려놓을 때마다 육지의 기운과 바다의 기운이 만난다. 깍두기는 처음 담가두었을 때의 아삭한 신선함과 익어서 나오는 신맛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계속 젓가락이 간다. 순댓국 먹던 도중 3천 원을 더한 순대정식을 1인분 추가로 주문했다.

육질의 신선도가 아주 높다. 이렇게 좋은 식재료를 쓰면서 이 가격에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작고 사소한 것이 아니라 작지만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라.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발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어디있는가 ? 모든 일들이 노력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니 세상에 감사할 일이 많겠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한 끼니를 해결해 주는 음식점이 나의 자산이다.


봄을 부르는 비가 내리는데 왠지 상큼한 느낌보다는 약간 꿀꿀하고 차가운 느낌이어서 몸이 가라앉는 날씨에 먹을 수 있는 최상의 음식을 먹고 힐링하는 이 기분을 느끼게 해 준 28년의 내공에 깊이 감사드리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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