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죽음을 준비하느라 매일 애를 써왔다.
자살 사고란 자살을 실행하는 행위가 아닌 자살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한시도 나를 떠난 적이 없는, 잊었는 줄 알고 돌아서면 다가와있고 까먹고 지내다가도 한참만에 다시 나타나 내 앞에 서있다.
살려고 혈압을 내리고, 체중을 정상체중으로 만들려고 식단을 하고, 등산길에 오른다. 해지기 직전 산을 오른 내가 본 풍경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해가 숨었어도 아직 하늘은 환했고, 산속은 어두웠다. 흰 밧줄과 나무가 눈에 들어왔고 자동적으로
저 밧줄을 걸어 매달기 좋은 나무가 어떤 나무일까? 나는 나무를 고르고 있었다. 적당히 굵고 너무 높지 않아 내가 손을 뻗어 올라갈 수 있는 나무.. 두꺼운 밧줄의 매듭을 짓기 어려울지도 모르니 밧줄은 미리 사서 올라오는 것이 좋겠다. 아무래도 집에서 일이 일어나면 분비물도 그렇고 발견도 오랜 후에야 될 테니, 내가 좋아하는 숲 속이면 더 좋겠다 생각하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왔다.
저녁식사 후 걷기 위해 나온 도로는 순환도로라는 이름에 맞게 차들이 속도를 내며 8차선 도로를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큰 차가 지나가면 인도에서 걷고 있는 내가 속도와 무게를 느낄 정도였다.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열심히 걷다가 내쪽으로 라이트를 비추는 차들로 환해진 길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달도 보였다 대보름쯤이어서인지 정말 뚜렷하고 밝은 달 안에 토끼가 있는 거 같았다. 그렇게 달을 보다가 다시금 큰 차가 엄청난 속도로 인도 바로옆으로 4차선으로 지나가니 갑자기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차량이 크면 클수록 확률이 높아지니 덤프트럭이 지나가면서 땅이 흔들릴 땐 내 마음도 울렁였다. 실패가 되어 사고가 된다면 그건 더 괴로울 것이다. 그러다가도 트럭 차주는 무슨 잘못으로 괴로워할 일을 만들어주나, 그는 당장 바로 그날 전달해야 할 일을 처리 못할 수도 당분간 그 차량을 사용할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나의 우울을 핑계로 그런 짐을 모르는 사람에게 넘겨줄 이유는 없었다.구지 불행을 다른곳으로 전이시킬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걸었다. 차소리는 너무 크고 나는 더 조용해졌다.
깔끔한 죽음을 모색했다. 심정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았다. 길에서 된다면 빨리 발견될 것이고 병원으로 이송되겠지 그렇게 살아나지 못하는 것, 혹은 살아서 의식 없는 상태가 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굳이 다시 살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죽음을 직면하게 될지 몰라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로 했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신청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비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더 죽고 싶었졌다. 그 병원비는 나를 또 누군가를 숨 막히게 하는 짐이 될 테니 그건 더더욱 싫었다. 그리고 정확히는 그걸 감당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살아서는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냈기에 죽어서는 조금이라도 쓸모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장기조직기증을 신청했다. 이것도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신청이라도 해 놓았다.
그러나 본인이 의향서를 등록해도 마지막 순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보호자)이 나타나 동의하지 않으면 나의 의지와 결정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게 이런 장치의 아쉬운 점이다.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게 끝까지 나를 답답하게 했다. 내 보호자는 현재 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나는 핸드폰의 전화번호들과 이름들을 다 지웠다. 장례식이라도 하게 되면 혹시라도 내 전화번호부의 이름을 찾아 연락을 해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까지 굳이 알려질 것이 싫었다. 죽어서도 남을 의식하는 그런 인간인 내가 또 한번 싫어진다.
몇 년간 전화하지도 전화 오지도 않기에 그간 문제되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원치 않는 소식이 전해져 쯧쯧 누군가의 동정 섞인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조용히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문득문득 괴롭거나 죽고 싶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 아닌 그냥 일상적인 날에도 이런 상상들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보며 감상에 젖을 일은 없었다. 나는 예전부터 죽어있으니까.
어떻게 죽는 게 가장 덜 피해를 줄지, 내가 죽은 후 나의 시체처리는 어떻게 할지,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사는 생명은 누구네 집으로 가게 될지? 누가 콩이를 키워줄지? 내가 가진 쥐똥만큼의 재산은 어디로 가게 될지. 친부모에게로 가서 다시 엄마의 아들에게로 토스되는 꼴은 죽어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유언증 공증이라도 받아두어야 하는 걸까? 그런 건 비용이 얼마나 들까? 재산은 콩이를 키워줄 사람에게로 가는 게 좋으려나? 이런 고민들을 나열해 본다.
하지만 실행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거나 조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남아 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사이의 벽에서 튕겨 다니는 공은 몇 변을 튕기고 다시 힘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
그렇게 매일을 보낸다.
매일아침 혈압을 재고, 몸무게를 재고 체지방을 확인하고, 물 마신 양을 기록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식단을 조절하고, 하루 만보 걷기 미션을 실천한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평소보다 덜 걸어서 계단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열심히 살기만 한다.
언제 다시 튕겨오를지 모르는 공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향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