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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te Liebe Aug 04. 2022

<햄릿>'Not' to be 에 이르는 절망과고독

연극 <2022 햄릿>을 보다.


국립극장에서는 연극 <햄릿>이 상연되고 있습니다.  세익스피어 원작에, 손진책 연출, 연기력을 검증 받은 젊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고, 박정자, 유인촌, 김성녀, 정동환, 윤석화 등등 선배 배우들이 탄탄히 받쳐주는 그림도 아름다워서, 아이폰 20이라든지, 맥북 에어4의 느낌이랄까요..? 보장된 만족. 아무리 기대치를 높여도 그렇게 크게 실망할리는 없는? 인터미션 포함해서 3시간 정도였던거 같은데,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긴장조차 안하고 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족스러웠어요! 




1. 이번 프로덕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건 유령- 햄릿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자기 욕망 밖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혼란스러운 젊은 왕자에게 선대의 유령이 나타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비극적인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헛게 보이는 걸 보니 기가 허한가보네,  오필리어랑 고기먹으러 가야지.” 하지 않고, 유령의 말에 발목이 잡히면서 왕자는 안전한 삶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Be skeptic, everyone!) ‘죽음/진실’인 유령을 만나면서 자신이 익숙하게 살고 있던 관계들과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햄릿에게는 이제 엄마도 연인도 동문수학한 재밌는 친구들도 더이상 예전에 알던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연극에서 유령은 햄릿과 진심어린 포옹을 나누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전무송씨가 선대의 왕인 유령을 연기했는데, 아버지의 느낌이 더 강조되는 캐스팅이네요. 유령을 만나게 된 주인공의 세계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절친인 호레이쇼나 연인인 오필리어도 그가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전 항상 햄릿이 지독하게 외로운 얘기라고 생각해왔는데, 진짜 그렇지 않나요? 주변에는 항상 감시하고 엿듣는 사람들 뿐이고, 진짜 소통은 존재조차 희미한 유령과만 가능할 뿐인데, 그 유령은 주인공에게 주변 관계를 다시 설계할 것을 강요해요.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단절 - 사람이 안미치고 남아날리가 없죠. 


그 프레임은 정의이거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미래, 혹은 감춰진 진실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이 작품은 윤리와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로움에 고통받고, 시대와 불화하다가 미쳐가고 결국 죽음을 맞는 그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실 햄릿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고, 이게 대강 이렇게 흘러가는 얘기인 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매번의 다른 햄릿을 올리는 예술가들은 자기의 이유가 있을텐데, 이번 프로덕션은 제가 이제껏 본 어떤 햄릿보다도 이 죽음의 문제가 전면으로 드러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무대의 죽음을 바라보는 관객과 삶의 액자로서의 연극에서 일어나는 배우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교차되면서 위로를 나누는 듯한 엔딩 장면에 이르면, 이런게 연륜이 쌓인 연출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달까요..?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어느 면에서 봐도 마당놀이 좋아할 나이는 아니지만 (수줍) 손진책 연출을 좋아하는 면이 이런데 있는게 아닌가 싶은데, 그정도면 대충해도 다들 알아서 먹어주는 위치에서도, 어떤 작품을 하든지간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남은 성실한 예술가의 고민을 항상 볼 수 있거든요. 


2. 각색을 하신 작가님은 아마도 점잖은 분이실 것이기 때문에, 대략 심한 대사는 정리한 듯도 하지만, 거트루드의 침실 장면을 보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관객들이 이 즙이 뚝뚝 떨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얼마나 즐겼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각색은 살짝 고풍스러운가..? 싶게 된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쪽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대사까지 지나치게 요즘 스타일로 했으면 넘나 임성한 드라마가 되고 말아…. 


그런데, 사실 햄릿에 대해 얘기하면서 오디푸스 컴플렉스를 얘기하지 않기도 힘들겠지만,  바람핀 자기 여친에게 하는 지랄인지, 엄마에게 하는 지랄인지 모르겠는, 거트루드의 침실 장면을 햄릿역의 장필성씨가 정말 자기 아버지 유령에 씌운 미친 놈처럼 해치운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연기에서도 아니, 햄릿가의 남자들 피에는 무슨 거트루드에게 성적으로 꽂히는 유전자라도 들어있는 건가 잠시 의아할 정도의 느낌은 남아있긴 했지만요. 친구랑 보다가 그 장면에서 저 자식, 엄마한테 버르장머리가 진짜.. 하고 잠시 함께 아줌마 분노를… 


3. 배우들은 다들 대체로 매우 훌륭하십니다. 모든 출연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발음이 정확하고 발성이 안정되어 있을 수가 있죠? 무덤지기 역 하셨던 권성덕 배우님. 흥얼거리면서 노래하는 듯 말하는 듯. 중얼거리는 말이 하나 하나 다 귀에 꽂혀서 깜짝 놀랐어요.



 단역 포함 모든 배우들의 기본기가 어마어마하니까 재밌어야 할 부분의 재미와 사소한 의미들도 다 살아남니다. 유랑극단 배우 역할로 박정자, 윤석화, 손봉숙씨가 트로이의 여인들 연기하면서 등장하는 장면조차 너무 굉장합니다. 


사실 자주 생략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별로 무대에서 자주 보지도 못하지만, 트로이의 여인들을 며칠을 붙잡고 읽어도 절대 못느낄 고통의 심장까지 진짜 1분만에 관객을 끌고 들어가는데, 진짜 굉장해요. 윤석화 선생님은 그 나이가 되서도 뭘하시든지 항상 ‘여자’ 느낌을 끌고 다니는 것도 너무 귀엽고.. 


젊은 주인공들은 햄릿, 오필리어 둘다 좋습니다. 어른들/대선배들에게 살짝 눌려있는 듯한 억압된 분위기까지 드라마와 잘 맞네요. 특히 오필리어 박지연씨는 무대에 올라와 있는 시간이 적은데도 순식간에 관객들의 호감을 사고, 동정하게 하고, 자기편으로 만들고, 결국은 울리는데 성공합니다. 무대광풍이랄까.. 보라색 장미라도 있었으면 보내주고 싶… 


박건형씨의 레어티스는, 너무 완벽한 타입 캐스팅이고 딱 그런 느낌으로 좋았는데, 본인은 좀 아쉽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뿜어나오고 싶어서 안절부절하는 화려한 에고가 느껴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캐릭터랑도 잘 맞고? 


4. 제가 개인적으로 햄릿 캐스팅에서 항상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클라우디우스 역입니다., 모든 드라마의 시작을 만드는 사람이고, 굉장히 많은 정황이 이 사람에 의해 세팅되는 면이 있거든요. 그는 섹시한가, 명예를 아는 사람인가, 강한 사람인가, 비겁한 사람인가, 권력욕인가, 사랑인가 등등. 클라우디우스가 매력적이면 이야기의 레이어는 훨씬 풍부해집니다. 거트루드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진폭도 넓어지고, 햄릿-유령이 느끼는 고립의 감각도 더 커질 수 있거든요. 



이번 공연에서는 유인촌씨가 클라우디우스 역을 맡았었죠. (약간의 비난을 감수하는 용기를 내보자면) 사실 저는 연극 무대에 선 유인촌씨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실 좀 기대를 했습니다만, 약간 애매한 면이 있네요. 


 유인촌씨는 좀 왔다갔다 합니다. 거트루드 김성녀씨와의 관계로만 좁혀서 보면, 어깨나 허리에 손을 올리는 등, 애정을 보여주려는 연기가 많긴 한데, 무대에 김성녀씨가 없으면 너무 만화책 빌런처럼 해버리는 면이 있는 점이 좀 아쉽네요.


말이 났으니까 말인데, 매력적인 남자들은 제발 권력이나 돈 같은거 신경안쓰고 살면 안됩니까? 지금은 사실 거의 아무도 유인촌씨를 안타까워하지도 않게 된거 같지만, 저는 무대에 선 유인촌씨를 보면, 그런 너저분한 걸 추구하지 않은 상태의 유인촌씨가 있는 평행우주 같은 걸 간간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실 어떤 일이나 지위는 사람들 중심의 섹시함을 매우 심하게 손상시키지요.  


음… 뭐 연기가 진짜 나빴다기 보다, 제가 기대가 과했던 걸 수도 있구요.. (긁적) 


5. 전체적으로 프로덕션은 정말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신시가 제작했는데, 역시 큰 무대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음악과 조명과 음향,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디자인된 것 같았어요. 무대 미술도 훌륭하고, 이동 무대를 비롯한 백그라운드 영상들이 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화려하고 장대하고 효과적입니다. 


 꽤 넓은 극장인데도 좋은 자리들은 빨리 빠지고 있는 듯 하더군요. 중간에 코로나로 1주일 휴관도 겪었고… 아무튼 안보면 후회할 수 있는, 올해 최대의 프로덕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잘만든 세익스피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의외로 그렇게 흔하지가 않아요. 강추, 강추.  8월 13일까지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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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아무런 더할 것이 없다는 만족스러운 죽음은 얼마나 될까요? 왜 다잉베드에는 그렇게 많은 말들이 떠돌까요? 레거시를 남기고, 그 유지를 받드는 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라져가는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꼭 그렇게 많은 당부를 해야하는 걸까요? 젊은이가 악취를 풍기면서 나타난 자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에 기뻐하면서?  


세대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이 시점에 생각해보면, 또 다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는 잇는군요. 세익스피어는 진짜 굉장하지 않습니까? 만드는 사람이 정신만 바짝차리면, 바로 오늘의 뉴스와도 연결되는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된단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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