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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Mar 17. 2020

우리에겐 숨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수강신청과 지하철

우리는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운건지도 모른다.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오늘은 8시에 눈이 떠졌다.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이였다. 몇 주동안 새벽 4시에 잠들고 정오에 일어나서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수강신청 정정 날'임을 머리로 알고 있는 이상 몸 역시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오늘은 개강날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 '사이버 개강'이라고 해야하나.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아직 오프라인 수업은 불가하다. 동기들을 만날 수도 없기에 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살펴봤다. 곧 반갑지 않은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커뮤니티 / KBS 편집

이클래스 서버가 터졌다. 일부 강의는 녹음파일이 제공되지 않아 실시간 강의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강'을 '현강'처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서버가 터졌다는 건 제시간에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출결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대학생활을 해봤다면 알 것이다. 대학생들은 학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출결에도 민감하다. 해당 과목 학점의 10%를 결정짓는 게 출결이니 당연한 얘기다. 4번 이상 결석이면 F를 받는다는 건, 뭐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가뜩이나 입학 이후로 처음 펼쳐진 '대학 사이버 강의'에 불안과 불만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당장 오전 9시 수업부터 서버 문제로 접속이 어려워지지자 다들 화가 많이 난 눈치였다.



다른 사람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내 얘기다. 하루종일 학교 수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클래스 서버가 터진 데 이어 (나도 모르게)증원된 전공과목을 놓쳤다는 것도 스트레스를 더했다.




어쨌거나 도가 됐든 모가 됐든, 19학점을 채웠으니 그걸로 됐다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일말의 찝찝한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아 눌러붙었고,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나 조차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오후 5시, 스터디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더니 오후 내내 피곤했다. 4호선에서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졸다가 사당 역에 도착했다. 사당에서 2호선으로 환승했다. 늘 그렇듯.


때마침 퇴근시간이라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겨우 열차에 오른 후 한동안 끼어있었다. 휴대폰을 만지기 어려울 정도로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으니 오전 내내 날 괴롭혔던 불쾌한 감정이 다시 기어올랐다. 동시에 얇은 막이 쳐진 듯 뚜렷히 볼 수 없었던 감정의 정체가 분명해졌다. 뿌옇던 눈앞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속도 때문이었다. 늘 뛰어야해서 그랬다.


속도와 경쟁은 동전의 앞 뒷면 같은 존재다. 항상 같이 가는 존재. 늘 경쟁상태에 놓여있던 나는 이기기 위해, 최소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뛰어야했다. 대학 입학 전 12년의 시간들은 예고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능에 논술까지 치고 대학에 들어오자 본격 레이스가 시작됐으니 말이다. 선택의 자유가 늘어난 만큼 그 선택을 지켜내기 위해 달려야했다.


수강신청은 '속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다. 0.1초라도 늦으면 수업을 못 듣는다. 고작 0.1초 손이 늦었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원치 않는 수업이라도 들으면 다행이다. 나처럼 졸업이 급한 4학년생들은 수업을 잡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된다.

대외활동, 인턴, 하다못해 교내근로도 속도가 중요하다. 데드라인 준수는 미덕이 아닌 필수다. 좁아터진 서버에 들어가려 애쓰듯, 많은 대학생들이 바늘구멍같은 기회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다. 남들보다 '빨리' '잘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다. ​

한창 붐비는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좌석은 적고 사람은 많다. 일부는 앉을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서있어야 한다. 그마저도 열차에 타보겠다고 몸을 끼워넣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오전의 날 괴롭히던 감정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글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기저에 깔려있는 그것은, 생존에 대한 불안과 맞닿아 있었다.




"고객님들이 넘어져서 다치시면 제 마음이 많이 아플 텐데요. 고객 여러분 안전하게 이용하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출입문 조치를 취하겠습니다만, 급하게 이용하시다간 병원에 가실 수도 있습니다. 열차 이용할 땐 조금만 더 느긋하게 천천히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가득 태우고 달리던 2호선이 문래역에 도착하기 전,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무원의 따뜻한 말에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켰다. 오직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영상을 찍었다. 다른 사람을 찍지 않기 위해 렌즈 초점을 가방에 고정했다. 그 영상엔 덜컹거리는 열차소리 속 승무원 분의 따뜻한 목소리만이 담겼다.


출처 unsplash


"오늘 하루도 일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강 옆을 달리는 동안, 바깥풍경을 바라보시면서 여유를 누리시길 바라겠습니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당산역 쯤에서 안내방송이 다시 시작됐다. '한강'이란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봤다. 강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1분이 채 안되는 여유였지만 날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당 역에서 탈때만 해도 지옥철이었는데, 그의 안내방송을 듣고 있으니 여행 길에 오른 '기차'로 느껴졌다.


냉정히 말해 현실은 변한 게 없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서버와 씨름하며 화를 낼 것이다. 저녁엔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할 것이다. 한 번의 따뜻함이 우리 삶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순 없다. 동대문까지 30정거장의 여정을 떠나며 남아있는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게 내 인생이다. 우리의 인생은 경쟁과 떨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승무원의 따뜻함은 피곤에 쩔어있던 내게 여유를 선물하기 충분했다.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 바깥의 한강을 바라보게 했고 귓가에 울리던 음악을 잠시 멈추고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이번 역이 어딘지, 다음 역은 어딘지 알려주는 그런 '기본적인' 안내방송이었다면 결코 이어폰을 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하지만, 정서적 거리까지 멀어지면 안된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락을 자주 할것을, 우리는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는 말이 내가 들은 마지막 안내방송이었다. 목적지인 신촌역에 내렸을 때 내 기분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사회 속에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을 바꿀 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지원을 해줄 수도 없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로 마음의 속도를 잠시 늦춰줄 수는 있으리라. 숨 고를 시간을 선물해줄 순 있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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