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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Aug 20. 2020

영화 <아가씨> 해석 : 베드신 너머엔 연대가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부끄럽게도 나는 <아가씨>를 여성들의 베드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홍보를 해서인지, 아니면 내 기억체계가 왜곡된 탓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8월 초 제대로 감상한 <아가씨>는 깊은 울림의 메시지를 주었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이 영화로 태어난다면 <아가씨>이지 않을까 싶었다. 허나 이 영화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미술이나 음악 같은 연출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선명한 메시지가 영화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주역이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친절한 금자씨>와는 결다른 아름다움이다.


1. 두번의 ‘배신’, 그리고 연대

<아가씨>는 발칙한 데가 있다. 끊임없이 관객들을 놀려먹는다. 에피소드1과 에피소드2는 사건의 줄기가 같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에피소드1은 숙희(김태리 역)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숙희의 입장에서 아가씨 히데코는 ‘숙맥’이다. “걔는요, 남자가 젖꼭지를 잡아당겨도 뭐하자는지 모를 숙맥이에요.”라는 대사가 히데코를 향한 숙희의 시선을 선명히 그려낸다.


사기꾼 ‘백작’이 계획한 대로 히데코와 숙희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히데코가 정신병동에 가나 싶었는데... 어라? 병원에 강제입원하게 된 건 히데코가 아니라 숙희였다. 히데코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


“불쌍한 우리 아가씨. 완전히 미쳐버리셨구만요.” 


여기서 관객은 일차적으로 얻어맞는다. 제대로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시작된 에피소드2는 히데코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모부’에게 받았던 교육을 빙자한 폭력, 이모가 왜 자살을 결심했는지, 그리고 낭독회의 진실. 우아하고 외로운 ‘숙맥’으로 보였던 히데코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말려있던 두루마리가 펼쳐진다.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안다.


히데코는 탈출을 원했다. 이모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하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낭독회에 찾아온 ‘백작’과 거래를 했다. 하녀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집에 데리고 오라고.



숙희와 히데코, 이 둘 중에 누가 더 나쁠까. 현재까지는 1:1 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입원시킨 후엔, ‘한밑천 잡아서 조선땅 뜰 것’으로 기대했다. 반면 히데코는 숙희를 희생해 자유를 얻길 원했다.



하지만 영화는 “누가 더 나쁠까?”라는 물음에 방점을 찍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배신한 두 여성은, 한 마음으로 연대하기에 이른다그 연대의 동력은 숙희의 고백이었다. 숙희는 죽은 이모를 따라가려는 듯 나무에 목을 맨 히데코를 부여잡는다. 이내 “아가씨, 제가 잘못했어요.” 로 시작하는 숙희의 고해성사, 그리고 눈물. 결국 히데코도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기에 이른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신하고 있던 관객이라면 두 여성의 연대가 적잖게 당황스러웠을 테다. 그렇게 감독은 ‘누가누가 더 잘못했나’ 판단할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의 사고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 두 여성은 결국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던, ‘사람’이었다.


2. 대상이 아닌 주체로 : 그녀를 ‘소비’하지 않는다


코우즈키(이모부)는 히데코에게 변태적인 것들을 강요한다. 단단히 일그러진 섹슈얼한 글을 , 일본인 신사들 앞에서 낭독하라는 식이다. 늙은 변태들은, 젊은 여성이 음란한 소설을 읽어준다는 사실에 더욱 흥분했을 터. 낭독회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히데코의 말이 대번에 이해가 된다. 그는 완전히 대상화되었다.



코우즈키는 히데코에게 교육을 빙자한 폭력을 행사한다. 구타와 폭행, 그리고 협박. “언제나 지하실을 생각하렴”



인간 히데코를 장소처럼 정박시키려 했다.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 당했던 히데코는 발이 있어도 떠날 수가 없었다. 죽은 이모와 생각만해도 무서운 지하실이 히데코를 햇빛도 안 드는 저택에 붙잡아놨다.


훗날 그 사실을 알게 된 숙희는 전례없이 분노한다. “그동안 이딴 걸 그 늙어빠진 신사 놈들한테 읽어줬던거에요?” 그리고 숙희는 책을 파괴한다. 찢고, 칼로 찌르고, 물에 처넣는다. 그 모습이 학대되었던 히데코의 지난 나날들을 대신 복수하는 듯했다.



히데코는 ‘운명’에서 도피하려 했을 뿐 있는 힘껏 저항하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코우즈키는 어린 히데코의 날개를 꺾어 절대 날아가지 못하게 했다. 어렸을 때부터 묶여있던 코끼리는 성장해 그 밧줄을 끊고 갈 수 있을때도 여전히 과거의 자신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렇게 ‘세뇌’된 코끼리는 결국, 묶어두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상태가 된단다.



어린 코끼리처럼, ‘붙박이’가 되었던 히데코에게 분기탱천하는 숙희의 모습은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주저하며 지켜보던 히데코는 이내 숙희와 함께 책들을 파괴한다. 빨간 물감을 뿌리며, 자신의 과거에 안녕을 고한다. 대상으로서 소비됐던 과거를 끊어내고 주체로서의 삶을 결단한다.



다음 장면, 잔디밭을 뛰어가는 두 여인의 웃음은 그래서 자유로웠다.



3. 책: 위장된 신사다움, 썩어있는 속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밖에서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선비같은 남자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선 더없이 음란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그랬고, 지금도 ‘일부’ 남성들이 그렇다.



‘책’은 그 위장된 모습을 영위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나 같으면 책 팔아서 금 사지, 금 팔아서 책은 안사겠네”라는 숙희의 대사만 봐도 그렇다. 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얼마나 정중한가. 하지만 그 책이 알고보면 더러운 욕망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들의 고질병을 들춰낸다.



서책을 파괴하는 숙희와 히데코의 모습이 더욱 통쾌한 것은 바로 그 ‘책’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4. 폭력적이지 않은, 서로의 시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中

<아가씨>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닮은 데가 있다. 여성들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라는 사실 외에, 사랑의 주체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코우즈키와 백작이 히데코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던데 반해, 히데코를 바라보는 숙희의 시선은 수평적이다. 뾰족한 이를 다듬어주고 옷을 입혀주고, 스킨십을 가르쳐주는 과정을 통해 히데코와 숙희의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단 한 점도 폭력적이지 않은, 참으로 무해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 시선이 참 좋았다.



또한 이 여성은 서로에게 의지한다. 말은 잘하지만, 읽고 쓸 줄 모르는 숙희는 히데코에게 글을 배우고, 숙희는 히데코를 돌보고 사랑을 알려준다. 이 둘 중 누구도 ‘뮤즈’가 아니다. ‘주체’로서 살아갈 뿐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5.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


<아가씨>가 유난히 와닿았던 것은 여성 주인공들이 가진 입체적인 면모 덕분이었다. 두 캐릭터 모두 우리가 흔히 그려내는 ‘착하고 순진한’ 그림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우선 숙희는 도둑의 딸이고, 그 자신도 도둑이다. 히데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겨울이면 훔친 가죽지갑을 엮어 외투를 만들어왔다는 유명한 도둑의 딸. 저 자신도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이다. 자신을 따돌리는 코우즈네 하녀들을 보며 ‘한 밑천 잡아서 조선 땅 뜬다. 촌스러운 종년들.’ 이라 생각한다.



물질에 대한 욕심도, 야망도 많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히데코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숙맥과 사뭇 다르다. 조선인 하녀를 속여 자유를 얻길 꾀하고, 수면제를 먹여 백작을 잠들게 한다. 가스라이팅 당해온 기나긴 세월을 뒤로 하고 자유와 사랑을 찾아 떠난다. 이 두 캐릭터는, <아가씨>라는 그림을 그려가는 선명한 빛의 유화물감 같다. 물로 결코 지울 수 없는, 유화물감.


6. 대사의 변용

이 영화엔 유난히 동일한 대사가 옷을 바꿔 입은 채로 자주 등장한다.



“자기 전 생각나는 액수” “자기 전 생각나는 얼굴”,

”너 낳고 죽을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다고.” 등이 그렇다.



이렇게 같은 듯 달라지는 대사는, 때론 배신을 위해 때론 위로를 위해 사용된다. 각 대사들이 사용되는 상황의 차이를 비교하며 살펴보면, 영화의 재미가 한층 더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굳이 베드신을 넣었어야 했나,는 의문은 남아있다. 한편 ‘베드신이 없어야 진정한 연대’라는 생각도 낡은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기도. <아가씨>가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하든, 육체적 사랑을 지향하든 내게 남긴 울림은 여전히 크다. 다만 베드신으로 ‘소비’되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라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요즘 내 영화감상의 철칙은 분명하다. 1시간 후, 하루 후, 일주일 후에 생각나지 않을 영화는 보지 않기로 했다. 거꾸로 말하면 두고두고 생각날 영화를 보겠다는 다짐이다. <아가씨>는 이런 철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영화다. 강박적으로 아름다운 연출과 음악, 귓가를 간질이는 배우들의 목소리까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집은 빛이 안 들어. 햇빛은 책을 바래게 한다고 이모부가 금하시거든.


더러운 욕망을 품고 있는 서책을 보존하기 위해 저택엔 오랫동안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숙희는 책을 바래게 하고, 히데코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 준 구원자였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영화 <아가씨>

왓챠 관람

한줄 평: 썩은 가부장제를 부수는, 여성들의 연대

평점 :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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