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thfinder Mar 27. 2021

영화 <마틴 에덴> 리뷰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투쟁과 환멸이다

내가 평론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토록 다행스러운 적은 없었다. <마틴 에덴>을 쓰는 평론가들은 대개 영화의 형식을 이야기한다. 촬영된 장면 사이에 끼워진 아카이브 필름을 논한다. 그런 평론 가운데, '마틴 에덴'의 이야기는 실종된다. 서사적 가치가 배제된다.

나는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대중에게 닿는 글을 쓰고 싶다. 영화적 기법을 알지 못해도, <마틴 에덴>은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보편가치로도 설명될 수 있는 영화라고 믿는다.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본 리뷰 자체가 영화에 바치는 찬사이며, 애정고백이다.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마틴 에덴>은 한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깨닫고, 작가의 삶을 결심한 남자의 이야기다. 열한 살부터 배와 함께 했던 선박 노동자 마틴. 어느 날 우연히 괴롭힘당하는 한 남자를 구해주고, 남자는 보답의 의미로 자신의 집에 마틴은 데려간다. 마틴은 그 집에서 만난 엘레나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둘은 연인이 되지만, 출신도. 교육 수준도 다르기에 여러 갈등을 겪는다.


영화 속 한 장면일 뿐,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이 영화는 포스터부터 허구를 심는다. 메인 포스터 속 마틴과 흑발여성의 모습은, 마틴의 '뮤즈'가 저 여성일 거라고 착각하게 한다. 틀렸다. 마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는 상류층 여성인 엘레나이다. 포스터 속 여성 마르게리타는 영화 초반부, 후반부에만 등장한다. 마틴은 마르게리타의 사랑은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마틴 에덴>은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로맨스적 요소가 있는 건 사실이나, 영화를 이끄는 중심추는 결코 로맨스가 아니다. 사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마틴의 자아'가 영화를 견인한다. 영화에서 두 여성들과 마틴의 지분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엘레나는 마틴에게 영향을 끼쳤다. 마틴 안의 지적욕구를 깨우쳤으며, 작가의 삶을 결심하게 했다. 마틴은 엘레나를 사랑했기에 항해를 떠나지 않았다. 글써서 돈을 벌려 했던 것도 엘레나의 곁에 남아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엘레나는 마틴과 계속 함께하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 생각, 사상 그 어느 것도 긍정하지 않았다.

마르게리타는 마틴 옆에 남아있는 존재였다. 루스의 말대로 "마틴을 돌봐줄 수 있는 여자"였다. 영화 후반부 잔뜩 피폐해진 마틴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도 마르게리타다. 하지만 그는 마틴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엘레나와 마르게리타의 사랑 모두 불완전했다. <마틴 에덴>은 반쪽짜리 사랑보단, 철학적 사상에 기대어 노를 저어간다.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 그리고 초대장


엘레나의 존재는 차라리 '상류계층의 모순'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영화 도입부 마틴은 이런 말을 한다.

"그림 보고 있었어요. 멀리서 볼 땐 멋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죄다 얼룩이네요. 그림이 사기쳐요."

나는 상류층의 삶이 얼룩 같다 느꼈다. 관망하면 대단히 멋있으나, 들여다보면 허망한 삶. 엘레나 역시 그랬다. 엘레나는 마틴이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말하고" 싶었던 대상이었으나, 결국 안온한 성에 안주했다. '마틴의 세계'를 두려워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마틴이 사는 저잣거리를 목도한 후에 그저 집에 가고 싶어한다.

마틴은 엘레나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었다. 엘레나의 세계가 마틴에게 손을 뻗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천한 신분이 상류층의 세계에 진입하려면 '초대장'이 필요하다. 마틴의 철학과 논쟁에 질려버린 엘리나는 그 초대장을 거두었고, 마틴은 본래의 자리로 회귀한다. 허나 더이상 육체노동에 기대어 사는 선박노동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이성이 육체를 뛰어넘었다.


마틴에게 엘레나는 묘한 존재였다. 마틴 안의 지적욕구를 깨우쳤으나, 그의 작가적 재능을 폄하하기도 한다. "당신은 절대 작가로 성공할 수 없을 거야" 와 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쓰는 이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인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다. 엘레나는 작가의 삶을 꿈꾸기 전 교육부터 다시 받으라고 강조한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마틴이 정규교육을 다 받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생각은 해본 걸까.

영화 후반부 장면이 압권이다. 마틴이 작가로서 성공한 후 엘레나는 마틴에게 돌아온다. "빌어먹을" 이라는 마틴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만류한다. 마틴은 "여전히 욕하는 거 싫어하는구나"고 답한다. 이내 웃는다. 결국 마틴과 엘레나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엘레나는 여전히 마틴을 구성하는 경험, 마틴의 동력이 된 생각들을 알지 못한다. 알려 하지도 않는다.

"나도 당신 부류이고 싶어.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 당신 옆의 개가 되고 싶어. 당신과 산책하는 멋진 개."

마틴은 엘레나의 세계에 속하길 원했지만, 불가능했다. 엘레나 옆의 '멋진 개'가 되는 것보다 개를 때려잡아라"는 내용의 시를 쓰는 게 더 용이했다. 후반부 마틴이 그토록 망가진 것은 그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틴 에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비주류의 목소리

<마틴 에덴>은 1시간 20분을 기점으로 급격히 어려워진다. 사회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각종 사상들이 대화를 장식한다. 토론과 대화로 점철되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에 알아듣기 어려워진다. 이런 사상적 논의가 없었다면, <마틴 에덴>은 글쟁이의 꿈을 그린 영화에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마틴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당시 주류였던 자유주의를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라며 비판했고, 사회주의 역시 엄격히 선을 그었다. 그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자'였다. 스펜서의 사상을 그대로 이식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은 자연과 같아서, 결국 모두가 '주인'을 갖게 되고, 주인과 노예가 존재한다는 생각. 조합과 같은 집단행동ㅡ설령 그것이 노동자의 권익을 추구한다해도ㅡ 은 결국 집단의 중요성만을 강조해 개인의 가치을 희석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의 발언이 신문에 실리면서 그는 사회주의자로 몰리게 된다. 사회주의자를 비판하기 위해 참여한 토론회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것 자체만으로도 그랬다. 연인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심지어 과일가게의 출입마저 금지된다.

영화가 후반부로 치닫을수록 마틴과 엘레나의 생각 차이는 커진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영감을 받은 마틴의 사고는 엘레나와는 점점 벌어진다. 엘레나는 함께 본 영화에 시큰둥한 마틴에게 "죽음과 고통이 가득한 날 것"이라며 비판한다.


성공과 몰락은 한 끝 차이

겉으로 볼 때 분명 마틴은 성공했다. 마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글을 싫어하던 이들이 이젠 내 글을 찾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를 무시하던 매형도 더이상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햇다. 마틴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의 낭독에 열광했다. 그렇다고 마틴이 행복해졌을까.




'마틴은 성공 후 행복해졌다'는 명제는 명백한 오답이다. 너무나 명백히 틀려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침몰하는 배 장면을 기점으로 마틴의 얼굴은 그야말로 찌들어있다. 마틴은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다. 담배 피는 모양새마저도 허망하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영화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간간이 끊어지는 느낌을 아카이브로 채워놓는 기법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 후반부, 다시 돌아온 엘레나에게 마틴은 "너무 힘들게 살아서 이젠 아무런 욕구가 없어. 욕구가 있다면 당신을 원했을거야"고 답한다. 욕구가 없는 삶, 그저 목숨이 붙어있으니 사는 삶, 텅 비어버린 삶. 배우 루카 마리넬리는 그러한 삶을 충실하게 연기한다.



철학과 사상은 마틴의 동력이 되었을까.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점점 그렇지 않아보였다. 마틴은 개인의 가치를 역설하는 개인주의자지만,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다. 여행 경비를 "전쟁을 막겠다"는 이에게 통째로 줘버린다. 그러면서 자신을 위해 셔츠를 사 온 마르게리타에겐 "돈은 너한테나 쓰라고 했잖아"라며 화를 낸다.



애당초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토론에 참석한 것도, “사회주의가 자네 글에 의미를 더해줄 거야." 라던 루스의 조언 때문이었다. 결말로 치닫을수록 그에겐 사상마저도 별 의미가 없어보였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삶. 내가 목도한 것은 그런 허망함이었다.



모든 성공이 그러한 모양새는 아닐 테다. 하지만 적어도 <마틴 에덴>에서 그려진 성공과 몰락은 한 끝차이로 보였다. "넌 지금 행복하지 않아. 다시 우리와 같이 살자, 예전처럼"이라던 집주인 아주머니의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영화 <마틴 에덴>

01.12 감상

평점: 9.5/10

한줄 평: 성공담도, 러브스토리도 아닌  이야기. 차라리 투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첨밀밀> : 홍콩이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