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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노 치는 변호사 Aug 14. 2015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 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
날 안아줘 날 안아줘
옆구리 터져 버린 저 김밥처럼
내 가슴 터질 때까지



가요 <김밥>.

딸 아이 어릴 적부터 같이 몸으로 놀며 불러 주던 노래다.

아이를 눕혀 놓고 소시지, 단무지, 계란을 얹는다며 머리카락, 손과 발을 한참 간지럽힌 후, 이불로 아이를 푹 덮어 주고는, 이불을 김 삼아서 아이를 김밥처럼 마는 흉내를 낸다.

잘 말아달라고 -. 잘 눌러 달라고 -.

아이와의 놀이가 늘 그렇듯, 어른에겐 지겹지만 아이는 이 김밥놀이를 무척이나 즐겼다.


잘 말고 잘 눌러 달란 노래가 엄마의 창작품인 줄로만 알던 아이가 어느 날 인터넷에서 이 노래와 마주쳤다.


어? 엄마, 어서어서~ 이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불러! 빨리빨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짐짓 잰 걸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 노래, 처음부터 들려줄까? 유튜브로 들어가 보자.


이 노래는 한동안 아이의 꿈나라 인도송이 되어 주었었다.



*


누가 뭐라해도 '김밥'은 부르거나 놀기 보다는, 먹어야 제 맛이다.

김밥을 무척 좋아하던 어릴 적 언니와 나 -. 이 못말리는 시스터즈들은 김밥매니아였다.

친정 어머니는 김밥에 들어가는 밥에 늘 새콤달콤 짭질한 배합초를 만들어 넣으셨다.

식초, 설탕, 소금으로 만든 배합초는 고실고실한 밥에 녹아 들어가면서 온 집안에 냄새를 풍겼다.

언니와 나는 참기름과 소금으로 밥간을 한 김밥은 진짜 김밥이 아니라고 여겼다.

‘울엄마 김밥만 진짜 김밥’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김밥을 빨리 먹고 싶어 김이 나는 밥에 열심히 부채질을 해댔다.

밥만으로도 이미 간이 딱 맞아 떨어져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졌지만

몇가지 속재료를 더 넣어 김밥 모양이 나오기까지 좀 더 참아야한다.

손빠른 어머니지만 딸들 재촉에 마음이 바쁘셨다.

김밥을 한줄한줄 말아 썰어 주시면 우리는 제비새끼마냥 김밥을 집어 먹고 받아 먹었다.

나는 피아노 한 번 치고 달려와 먹고, 또 달려와 먹고… .

보이는 걸로만 따지자면, 김밥 마는 어머니 보다 먹어 없애는 우리가 더 바빴다.


김밥은 잘 체한다고들 하는데, 배합초 들어간 엄마의 김초밥은 먹을 때마다 입안 가득 침이 돌아 체한 적이 없다.

진짜 김밥이라는 언니와 나의 주장이 사실인게다. 풉.

다람쥐가 구멍 드나들 듯하며 재빠르게 김밥을 먹어치우자, 여전히 김밥을 말고 계신 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김밥을 열 줄도 더 말았는데 다 어디로 갔나~~~


*


엄마.

참 좋은 이름이다.


이 세상 살며 아이를 두 번 가졌었고

그 중 한 아이를 낳아 지금 기르고 있다.

첫 아이를 잠시 품었다가 유산한 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기르는 사람들은 무슨 용한 재주가 있나, 나만 모르는 비법이 있나, 의아했다.

그 비법을 일찌감치 못 알아둔 내가 밉고 세상빛 못 본 아이에게 미안해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다.

그래도 그 때도 재판은 다니고 상담은 하고 서면은 썼다(죽어도 어길 수 없는 약속들이 내게는 많았다.)

암 걸렸던 사람은 아기도 가지지 말라고 어디 법규정에 써있나 싶어 세상을 향해 보이지 않는 발길질도 무수히 해댔다.  

나도 나를 말릴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나도 어서 엄마가 되어 척척 김밥을 말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 노릇을 ‘한다’는 것 -. 당시 내겐 절체절명의 소원이었다.



허나, 지금 이불에 돌돌 말려 김밥이 된 채 키득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싱거운, 하지만 적어도 내겐 중요한 명제를 다시 확인한다.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느냐로 우리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잘 말고 잘 눌러서,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맛난 김밥이 되어 주는 것, 그 이상 가치로운 경험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노라고.

내 삶 속에, 잘 말리고 잘 눌려져 받아 온 사랑을 또 그렇게 굴려 보내는 것으로

행복하며 족하겠노라고.





by 피아노 치는 변호사 박지영



* 2014년 가을 기고했던 글을 조금 다듬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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