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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딧쓴 Oct 03. 2023

추석 인사 뭐라고 보내지?

명절과 연휴, 추석과 한가위. 그리고 뉘앙스와 이미지.

이번 추석인사, 주변에 뭐라고 보내셨나요?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텍스트에 민감한 삶을 살다 보면 이상한 지점에서 멈칫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인사말이 가장 대표적이지요. 남들이 보면 참 쓸데없는 고민일 겁니다.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 제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말맛을 잘 내시는 치과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저 사람은 인생에 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저러고 있나 싶다"고요.


저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하고 생각하긴 합니다. 그래도 글을 다루는 사람인데 생각 없이 글을 쓰면 안 될 것 같은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인사말이 필요한 글을 쓸 때면 매번 고민하는 편입니다. 이메일도, 오랜만에 하는 카톡도, 이번에는 추석 인사가 그랬고요.


매드 덴티스트로 불리게 된 양치법 영상. 아주 유익합니다.(유튜브 채널 '나는 의사다')


이런 부분에 민감하지 않은 분들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셨을 겁니다. 약간 민감한, MBTI로 치면 대문자 I 성향인 분들은 매번 사용하는 인사말이 정해져 있을 거고요. 저는 매해 상황이나 상대방에 따라 조금씩 조합을 다르게 하는 편입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추석 잘 보내!
풍성한 한가위 되셔요.


제일 기본형으로 떠올릴 수 있는 조합만 네 가지네요. 쓸데없지만 각각의 차이를 뜯어볼까요? 디테일을 과하게 파고들면 왠지 전문가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기대 중입니다. 연휴 마지막 날 심심풀이로도 좋고요.



명절과 연휴


명절
-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천재학습백과)
- 오랜 관습에 따라 해마다 일정하게 지켜 즐기는 날(한국민족문화대백과)


명절은 이런 뜻입니다. 격식을 차리는 듯한 뉘앙스를 주지요. 오랫동안 사용한 한자어다 보니 공손한 느낌도 있습니다. 주로 격식을 차리는 거래처, 예의를 갖추는 어른들 앞에서 튀어나오는 표현인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표현한 '즐거운 명절'보단 '평안한 명절'이라는 표현이 왠지 착 붙는 느낌입니다. 한국은 격식에 민감한 나라니까요. 명절은 해마다 지키는 관습이라는 의미가 내포되면서, 예를 갖추어 행하는 의식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습니다.


반면 연휴는 명절보다는 가벼운 느낌을 줍니다. 연휴는 굳이 사전을 찾아볼 것도 없지요. 연속된 휴일이라는 뜻이 바로 보이니까요. '즐거운'이라는 형용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연달아 쉬는 날은 즐겁잖아요. 격 없이 지내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연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합니다.



추석과 한가위


추석
-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한국세시풍속사전)
한가위
-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 또는 가을의 가운데를 의미하며 한가위의 ‘한’은 ‘크다’는 뜻이다. 크다는 말과 가운데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한가위란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란 뜻이다. 또는 가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고 할 수도 있다.(한국세시풍속사전)


추석과 한가위는 뜻풀이부터 알고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익숙한 단어들도 그 뜻이나 어원을 알고 나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 예쁘게 들리기도 하거든요. 추석의 뜻이 생각보다 꽤 감성적이지 않나요?


명절, 연휴와 달리 추석과 한가위는 특정성이 있는 단어입니다. 명절과 연휴는 여러 대상을 지칭할 수 있지만, 추석과 한가위는 그 해 가을의 특정한 날만을 지칭하니까요.


한가위보다는 추석이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올해 한가위가 언제지?"라는 표현보다는 "올해 추석 무슨 요일이야?"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니까요. 한가위는 명절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왠지 더 전통적이고 더 격식을 차린듯한 단어지요.


한가위는 특이하게도, 풍성하다라는 형용사를 세트로 달고 다닙니다.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한가위는 풍성해야만 할 것 같아요. 즐거운 한가위, 평안한 한가위보다 풍성한 한가위가 입에 착 붙습니다. 왠지 꽃무늬 가득한 이모티콘과 함께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잘 쓰지 않게 되는 표현이기도 하고요.


그나마 출처를 알 수 있었던 한가위 짤


이런 짤에 가장 잘 녹아드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꽃과 단풍 가득한 사진에 붓글씨로 쓰인, 추석날 아침에 부모님이 어디서 주워와서 전달해 줄 것 같은 그런 짤방. 사실 풍성하다는 형용사 자체도 한가위와 붙어서 쓸 때 말고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푸짐한 구성 정도가 가장 유사한 뜻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아요.



뉘앙스와 이미지


형용사와 명사를 골랐으면 이제 서술어만 고르면 됩니다. 사실 되라고 할지 보내라고 할지는 앞에 고른 단어의 배열에 따라 이미 결정되는 부분입니다. '풍성한 한가위'라고 했으면 되라고 하는 게 어울리고, '연휴 즐겁게'라고 했으면 보내라고 하면 되니까요.


뭔가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되게 피곤하게 사는 사람 같은데, 사실은 그냥 뉘앙스만 골라서 보내긴 합니다. 보내고 나서 그냥 한 번 곱씹어보는 거예요.


정말로요..


굳이 여기서 서술어까지 글을 질질 끄는 건, 이 부분에서 가장 애정이 담기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최근 너무 바쁘게 일을 하는 친구에게는 연휴 동안 푹 쉬라고 하기도 하고요, 건강이 걱정되는 친구에게는 잘 좀 챙겨 먹으라고 하면서요. 요즘은 글이 주는 뉘앙스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명절/연휴/추석/한가위는 모두 동일하게 기능할 수 있는 표현임에도, 각각의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더라도 사용하는 단어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단어의 나열도 어순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어순이 지나치게 자유롭다는 것도 한국어의 재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어순이 달라져도 의미는 그대로 전달되지만, 뉘앙스는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영어는 안되잖아 이런거. 이런거 안되잖아 영어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런 뉘앙스를 쌓아가면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도 계속해서 브런치 프로필의 소개글을 바꾸고 있어요. 인생에 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고 있나 싶지만.. 제게는 나름 중요한 일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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