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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에딧쓴 May 02. 2024

단어 자체에 묻어나는 사람의 뉘앙스

내가 쓰는 단어에는 내가 묻어난다

저는 회전교차로를 무서워합니다. 운전할 일이 많지는 않지만, 운전을 할 때마다 자주 지나가게 되는 회전 교차로가 있거든요. 회전 차로의 각 진입로와 진출로 바로 앞에는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회전 차로에는 당연히 신호등이 없고, 보행자 횡단보도에도 신호등이 없습니다. 끼어드는 차량, 진행 중인 차량, 나가야 하는데 비켜주지 않는 차량, 나가자마자 만나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등 신경 써야 할게 순간적으로 많아집니다. 그렇다 보니 그 교차로를 지날 때마다 긴장을 하는 편입니다. 


오늘 오전, 여느 때와 같이 회전차로를 지나는데, 어떤 남학생이 어슬렁어슬렁 횡단보도에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이 많음에도 건들거리며 느긋하게 횡단보도에 들어서더라고요. 정지선 앞에 차를 세우자, 양보해 줘서 고맙다는 뜻의 가벼운 목례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좀 뜻밖이었어요. 차량은 쳐다도 안 보고 제갈길만 갈 줄 알았거든요. 왜 그렇게 느꼈나 생각해 보면,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걸음걸이 하나로 주변 신경 안 쓰는 무심한 사람으로 생각해 버린 거죠.


괜스레 미안했습니다. 걸음걸이 하나로 성품을 가늠하려 했다니. 스스로에게 조금 부끄럽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나도 내가 모르는 새 하게 되는 아주 사소한 행동, 습관 하나로 안 좋은 선입견을 만드는 경우가 있겠구나.'


보일만한 행동이나 습관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 보니,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섣부른 판단'은 말 습관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어 자체가 가지는 뉘앙스


말 습관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말 끝을 흐리는 습관, 장황하게 늘어나는 설명, 흥분하면서 말이 빨라진다던가, 말을 끊는 버릇이 있다거나 할 수 있겠지요. 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대부분은 상호작용적인 요소일겁니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태도'처럼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상호작용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에 대한 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사용하는 어휘'라는 말습관이지요. 심지어 특정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면 더더욱 인상에 영향을 미치기가 쉽습니다.



마침내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런 장치를 사용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라는 단어는 어떠한 일이 마지막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단어 자체에는 사용자가 그 마지막을 간절히 기다려왔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는 이 단어가 굉장히 강렬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극 중 송서래(탕웨이 분)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성입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형사(박해일 분)에게 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굉장히 낯선 등장입니다. 배우자의 죽음을 간절히 기다려왔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니까요. 마침내가 처음 등장한 시점에서는 송서래의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단어의 이질감을 덮게 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송서래가 마침내라는 단어의 어감을 정확히 알고 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단어의 의미 자체가 가지는 뉘앙스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단어 자체에서 사용자의 감정이 묻어나게 됩니다.


톺아보기

마침내라는 단어는 단어의 의미가 어떤 뉘앙스를 형성했다면, 단어의 의미와 별개로 사회적 맥락 때문에 발생하는 뉘앙스도 있습니다.


톺아보다라는 단어는 '샅샅이 톺아나가면서 살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톺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라는 뜻이 나옵니다. 톺아보다는 말을 쉬운 말로 풀어쓰면, 샅샅이 살펴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톺아본다는 표현을 자주 만나게 되는 곳은 보통 온라인상입니다. 리뷰 콘텐츠나, 어떤 현상에 대해 전문적인 견해를 정리하는 글 등에서 주로 볼 수 있습니다. '톺'이라는 글자 자체도 생소하거니와, '톺아본다'라는 발음 자체가 입에 잘 붙지 않기 때문에 입말로 쓰기에 상당히 어색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으로 자주 쓰는 단어가 아니기에, 단어 자체가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글에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지요. 그럼에도 그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톺아보기는 살펴보기 정도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은 과시적인 성향 때문일 수 있겠네요. '과시적인 성향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제 선입견에 기반한 뉘앙스를 말하는 겁니다.


핍진성

혹은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얼추 비슷한 의미이기는 해도, 톺아보기의 어감은 살펴보기보다 좀 더 샅샅이 뜯어보는 느낌이니까요. 친구 중에 핍진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생소한 단어이다 보니 들을 때마다 뜻을 검색해야 했었지요. 저한테는 잘 외워지지도 않는 의미였습니다.(지금도 한 줄로는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핍진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고유의 의미가 있기에, 마땅한 대체어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경우라면 단어의 사용자가 조금 고집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어휘인가에 대한 우려보다 앞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친구는 제가 핍진성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고 저를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네요. 미안해 친구야..



메타인지(를 비롯한 전공용어)

어쩌면 둘 다 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어를 굳이 찾으면 있기는 하지만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기에 설명이 부족해진다는 느낌과,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전문성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 수도 있지요. 제가 그랬습니다. 전공이 심리학이다 보니 일상 속 대화에서 전공과 관련된 소재가 등장하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요. 그럴 때 굳이 풀어서 설명하기보다 전공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짓이었어요. 핑계를 대보자면 요즘은 지식 자체가 상향평준화 되다 보니, 메타인지나 인지부조화 같은 단어는 종종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이 정도는 알지 않을까? 하는 지식의 저주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어휘의 정확한 의미보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순간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ROAS

ROAS(Return on Ad Spent), 광고를 집행하기 위한 지출 대비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말할 때는 '로아스'라고 합니다. 과자이름 같기도 하네요. 주로 마케팅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마케팅 분야 외에서는 안 쓰는 말이기도 하지요.


업무용어 외에도, 마케터들은 이런저런 말들을 참 잘 만들어 냅니다. 그중에서는 공감이 가면서 재미있는 할매니얼 같은 단어도 있고, 신조어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탄생한 신조어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축제 기획을 하다가 마케팅 회사로 이직을 처음 했던 시기에, 저런 낯선 업무용어들과 한참 씨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용어들은 검색해도 유사한 다른 의미들만 나와서, 결국 누군가에게 물어봐야만 했던 영어 약자들도 있었어요.


이런 단어들은 전공용어와 비슷한 어감을 갖지만, 해당 분야 안에서는 단어의 사용 자체가 전문가(라고 쓰고 고인물이라고 읽는)로 보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위의 어려운 어휘와 비슷하겠지만요. 효율적인 의사소통에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어휘의 출현으로 전문성을 확보하는 형태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스타를 IG, 유튜브를 YT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거든요.


이런 느낌이라서요


인프제

전문용어들이 폐쇄적이기 때문에 어떤 뉘앙스를 갖는다면, 지나치게 보편적이어서 어떤 뉘앙스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갑자기 MBTI가 나와서 놀란 분들도 게시겠지만, 딱 인프제라는 단어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회적인 유행 때문에 특정 시기에만 보편적으로 쓰이는 어휘들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 어휘들에는 시대적인 분위기가 반영됩니다. 엽기, 담탱이, 즐, 이런 단어들에서는 90년대의 쿰쿰한 향기가 풍기지요. MBTI의 성향들을 발음대로 읽은 인프제, 엔팁 이런 단어들에서도 지금 시대의 냄새가 묻게 될 겁니다. 급식체, 잼민이 같은 인터넷 용어들이 주를 이루겠네요. 인터넷 용어라는 말도 쓰고 보니 참 고전스럽긴 합니다만..


시대적인 분위기가 담긴 유행어는 좋게 말하면 유쾌한 느낌, 안 좋게 말하면 가벼운 느낌을 줍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는 농담 삼아 쓰기 좋지만, 일하는 환경이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제해야 하는 어휘들이 되겠네요.



내가 쓰는 단어에는 내가 묻어난다


'마침내'로 시작할 때는 감성적인 분석이 될 줄 알았는데, 다 쓰고 보니 여기저기 저격을 남발해 버린 느낌이네요. 특정 단어의 목록을 작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어떤 느낌들을 대표하는 단어를 임의로 골랐을 뿐입니다. 혹시 저격당하셨더라도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괘념치 말아 주세요. 마음에 두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D


아마 동의되지 않는 어감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단어에 가지는 인상이 다르니까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단어들이 이런 뉘앙스다'라기보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에 내가 묻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가 뱉는 말, 쓰는 글은 당연하게도 사람의 생각에서 나옵니다. 사람의 생각은 사람의 성향을 반영할 수밖에 없고요. 그렇기에 언어의 표현적인 특징, 사용하는 어휘는 당연하게도 사람을 반영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사용하는 단어는 누군가의 인상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단어로 형성되는 인상은 상당히 주관적이지만, 상당히 순식간에 형성되기 때문에 섣부른 선입견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겁니다. 그 선입견의 가해자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피해자가 되는 것도 순식간일 테니까요.


어쩌면 조금 오바스러운 글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저런 단어 하나 듣고 저렇게 까지 생각해?'라는 거부감이 올라올 수도 있겠네요. 솔직히 오바스러운게 맞긴 합니다. 어감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무의식적이고, 보통 그런 무의식을 붙잡고 늘어져서 이렇게 글로 뽑아내기까지 하지는 않으니까요.


어감에 대한 민감도는 제가 과하게 높은 편이라서 그렇습니다. 굳이 좋게 포장하면 섬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적나라하게 말하면 예민하다, 눈치를 많이 본다가 될 수도 있겠네요. 예민하다는 너무 안 좋게 들릴 것 같고, 섬세하다는 자아도취처럼 보일 것 같아서 민감하다를 선택했습니다. 어휘 선택에 이 정도로 과하게 고민하다 보니 글 쓰는 게 어려울 만도 하네요. 아, 신중하다고 하는 게 좋을까요? 어떤 표현을 쓰는지에 따라 저에 대한 인상이 다르게 형성될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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