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몰라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기를 쓸 때 느껴지는 어려움과 일터에서 글을 쓸 때 느껴지는 어려움은 성격이 다릅니다. 일기 쓰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글이라는 형태의 표현 자체가 익숙지 않아서일 확률이 높습니다. 추상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묘사하는 것이 낯설다면, 일기장에는 "오늘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맛이 좋았다." 같은 객관적인 사실과 단편적인 감상이 적힐 수밖에 없습니다. 많이 해보지 않아서 어색한 겁니다. 운동을 처음 배울 때 모든 동작이 낯설어서 뚝딱거리게 되는 것처럼요.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많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일터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나만 보는 글이 아니잖아요. 거래처에 보내는 이메일, 카페에서 손님에게 안내하는 안내문, 브런치에 올리는 에세이. 이런 글들은 나 이외의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읽는 사람은 글을 쓴 사람인 나에 대한 어떤 느낌을 받을 겁니다. 남이 읽는 글은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일기와 다르게요.
글을 통해 형성되는 느낌, 인상은 내 '일'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클라이언트가 나를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고, 손님들이 뉘앙스를 오해하면 카페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을 떠돌다가 한 카페의 안내문을 봤었는데요. 안 좋은 댓글이 너무 많아서 사장님이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메뉴 주문 시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여유롭지 않은 분께서는 주문을 자제해 주세요.
"사장님 손이 느린 것을 손님 마음의 여유 탓을 한다"라거나, "다른 카페도 많은데 굳이 저런 말을 들으면서 사 먹을 필요가 있냐"라는 식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는 진심으로 사장님께 조언을 해주는 댓글도 있었고요. 며칠 뒤에 같은 내용의 안내문이 다시 게시되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만들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레시피가 복잡한 메뉴는 다소 시간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카페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시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유를 즐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메뉴가 준비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라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전달되는 어감이 달라졌습니다. 댓글 반응도 덩달아 달라졌고요. 무엇보다 카페에서 주문 후 기다리는 마음이 달라졌을 겁니다.
알고리즘 때문인지 실제로 늘어난 건지, 글쓰기 모임이 많이 보입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일기와 같이 감정을 풀어내는 성격의 모임과, 글쓰기 능력을 키우고 싶은 모임. 덩달아 글쓰기를 주제로 운영하는 계정들도 찾아보게 되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두 가지 메시지로 나뉘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 쓰세요."와, "이렇게 쓰세요."로요. 둘 다 하는 경우도 물론 있고요.
아무래도 채널이 인스타그램이다 보니, 온갖 종류의 글쓰기 팁은 다 본 것 같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써라, 번역투 표현을 피해라, 핵심을 명확하게 해라, 공감하듯 써라 등등. 사실 완전히 색다르고 완벽하게 절묘한 팁 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있으면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겠지요. 이미 다 잘 쓰고 있을 테니까요.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반드시 '잘 쓴다'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게 맞나?', '이 정도면 되나?', '내가 놓치고 있는 팁은 없나?' 하는 마음이 반복될 거예요. 사실 어느 정도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방법을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쓰는 법, 글 쓰기 팁은 10년, 아니 20년 전부터 있던 콘텐츠이고, 그때의 방법과 지금의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방법을 몰라도 상관없는 시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요 며칠 챗 GPT4o와 대화를 해봤는데, 너무 잘 써주더라고요. 인터넷 어딘가에 있는 글쓰기 원칙, 글쓰기 팁을 모조리 학습시키고, 초안을 주면 그럴듯한 글로 완성시켜 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한들, '잘 쓴 글'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이 없으면 불안감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챗GPT로 얻은 글을 그냥 쓰자니 어딘가 아쉬운데,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느낌. 그 불안감은 '어떻게 읽히는지 모르겠어서' 생긴다고 봅니다. 인간은 모호한 대상,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거든요. 이 글을 통해 어떤 느낌이 전달될 테고, 어떤 인상이 형성될 텐데, 그걸 잘 모르겠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생각하는 잘 쓴 글의 기준은, 표현하고 싶은, 혹은 전달하고 싶은 느낌을 의도대로 잘 전달한 글입니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더 이상 글쓰기 팁 같은 걸 찾아 헤매지 않게 됩니다. 별로 의미가 없거든요. 문장이 조금 길어도, 글쓰기 원칙 같은걸 조금 지키지 못했어도, 내 의도를 내가 원하는 느낌으로 정확히 전달했다면 그만입니다.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과 느낌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다릅니다. 위에서 말한 카페 사장님처럼요. 글을 통해 내 인상이 결정되는 환경에 놓여있다면,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만큼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영역입니다.
어쩌면 지금껏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글을 못 쓰기 때문이 아니라 불안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쓰기 팁이 이 '어떻게 읽히는가'의 기준과 연결됩니다. 짧게 쓰면 가독성이 좋아지지만, 짧게 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더 적은 글자 수로 내가 원하는 느낌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과 하루를 대화하는 것과, 5분을 대화할 때, 상대방이 나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쪽은 대화가 짧을 때니까요. 하지만 보통 우리에게는 5분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짧게 쓰라는 원칙이 대원칙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즘은 5분짜리 글도 읽으려는 사람이 많이 없다고 하니까요.
얼마 전부터 어감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이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UX라이팅 작업을 할 때도 느꼈거든요. 버튼명이나 유저 flow와 관련된 컴포넌트 텍스트들은 어느 정도 정답에 가까운 선택지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가장 효율적인, 가장 간결한 텍스트들의 사례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 어감이라는 영역은 정답이 없습니다. 브랜드가 전달하고 싶은 느낌을 전달하는 것. 어쩌면 브랜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요. 작업 초반이 지나가면 나중에는 어감을 다듬는 작업을 주로 하게 되더라고요.
정답이 없는 영역이다 보니, 민감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쓴 표현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선택지가 얼마나 있는지, 각각의 선택지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단어와 표현이 주는 뉘앙스를 구별할 수 있다면, 원하는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지금 내 글은 어떻게 읽히는가.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한 의구심만 해결되어도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확 줄어드는 게 느껴질 겁니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 불안감은 방법론적인 글쓰기 실력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수 있어요.
분명 글을 잘 쓰는 것 같지 않은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저처럼)이 있는 반면, 반대로 충분히 괜찮은 글을 쓰면서도 자신 없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훈련과 글에 대한 불안감은 한 번쯤 별개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의 글이 전달해야 하는 내용을 다 담고 있는지, 기술적인 부분들을 충족했는지만 고려하고 있었다면, 어떤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지도 한 번 점검해 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