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낯설게하기 Oct 22. 2020

먹고 살아야 하는 김에

코로나 백수의 하소연 에세이

타지에서 최소 6개월 정도는 머무를 생각을 하니 차에 실은 짐이 꽤 되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기 때문에 짐을 들고 계단을 몇 번 오르락 내리락했다. 우리 집은 11층. 짐을 옮기며 다시 한 번 인생이 지긋지긋해졌다.   

이번 목포행은 부모님과 동행했다. 정년퇴직 후, 집 밖으로 계속 나가고 싶어 했던 아빠는 신나는 여행을 떠나는 듯 흔쾌히 시간을 비워주셨고, 생전 사보지 않은 멋쟁이 밀짚모자 하나를 구입하셨다. 



네비게이션에 목포역을 찍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서울에서 목포로 이동하는 차 안 갑자기 3명의 클라이언트로부터 연달아 일 의뢰가 들어왔다. 갑자기 내가 떠나려니까 일을 주다니. 일을 줄 거면 일찍 주지!! 에라이 날 몰라. 난 떠난다. 하지만 ... 또 ... 혹시 모르잖아?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10년간 쌓아둔 사회성을 끌어모아 아쉬움과 미안함과 또 다음을 기약하며 적당히 다정하면서 정중한 거절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런데 일을 거절하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안 하고 와 별개로 아직 누군가 나에게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이 한 톨의 자존심을 지켜준 것 같아서. 정말 개 코딱지 같은 자존심이다. 이걸 버리지 못하면 나는 아마 평생 돈돈 하며 전전긍긍 살게 분명했다. 



 이른 오후, 4시간 30분을 달려 계약한 발라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원룸을 구할 때 조건으로 내건 '햇볕이 잘 들고 창가에 초록색 나무가 울창한' 적당한 가격의 집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더니, 이곳에 웬만한 집엔 거의 다 볕이 잘 들고 창가에 나무가 있다. 넉넉한 크기의 거실을 가로질러 빈 방의 문을 여니 창가에 3개의 화분이 올려져 있었다. 내가 오기 전 이 방을 썼던 사람이 놓고 간 화분이었다. 그것들이 주는 생명력이 얼마나 위안이 되고 다행스러웠던지 낯선 곳에 짐을 풀며 몇 번이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부모님도 잠깐 집을 훑어보시고 별다른 잔소리가 없으신 걸 보니 생각보다 집이 살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대충 짐을 풀고, 부모님과 집 앞에 커피와 팥빙수를 파는 떡집(?)에 들어갔다. 일 년 전 쥐재 차 방문했던 가게였는데, 85세 바리스타 할머니께서 직접 커피를 내려주시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할머니 이야기 듣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녀는 매일 맑고 씩씩한 기운으로 새벽마다 떡을 찌고, 커피를 내리며 젊은 사람보다 훨씬 더 깨어있는 시각과 삶의 지혜를 이야기해 주시는 어른이었다. 우리는 우유 빙수와 콩떡 하나를 주문했고, 할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전용 의자에 슬며시 앉아 아빠와 엄마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젊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교?”


“네?”


“자네들 말이여. 저쪽 젊은 아가씨(나)는 내가 가끔 봤는데 자네들은 영 처음 보는 사람들이네?”

 


얼마 전 환갑이 된 엄마 아빠도 할머니에겐 아직 젊은 사람. 파도같이 우렁차고 거대한 아빠의 웃음소리가 작은 가게를 메웠다. 



 “아니, 우리 딸이 꼭 여기를 와야 한다고 하대요? 저희는 서울에서 왔어요. 우리 딸이 여기서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할머니. 목포에서 유명 인사야 허허허”


“아빠 아무도 나 모른다고...제발 좀...!!!”


“저쪽 처자 보면, 내 손녀가 생각나서 맴이 짠해. 우리 손녀도 연극 영화과 나왔거든. 여자애가 머리도 짧게 자르고 그 무거운 카메라 맨날 들쳐매고 뭘 촬영한다 뭐 한다 하면서 화장도 못하고 돌아다니는데 짠 허다고. 근데 뭐 어쩌것어?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너무 돈, 돈 하면서 살면 빨리 죽어.”



죽음을 저렇게 캐쥬얼하게 말할 수 있다니. 이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제일로 시집을 잘 갔다고 하는 애들이, 의사나 변호사나 은행원한테 시집간 애들이었어. 그중에 누가 제일 돈을 많이 벌었게?”


“정답, 의사!”


“은행원 아내야. 남편 이름으로 대출을 어마어마하게 받아서 대치동에 부동산을 막 사고 돈을 굴릴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은 돈 때문에 근심 걱정이 많아서 제일 빨리 죽었어. 그리고 의사나 변호사 아내들은 자기가 머리나 몸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대부분 치매 걸리거나 발을 헛디뎌서 몇 년 동안 침대에 누워있는 애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런데 나 봐봐. 맨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떡 만들어야 한다니께? 이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어? 자급자족 ! 나는 내가 벌지 못하면, 돈이  안 나오니께 떡도 만들어야 하고, 떡도 옮겨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고 하여튼 치매에 걸릴 수가 없어. 그런데, 우리 집 양반은 떡 옮기면서 한 뼘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고. 그러면 내가 말하지. “여보쇼. 얼마나 좋소. 헬스클럽도 안 가도 되고. 절로 운동이 된당께?”


할머니의 위트에 우리모두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말로 독립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여성이다. 

할머니의 연세에, 그녀보다 몸이 곧고 눈과 목소리가 맑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의 꿈은 그런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오래전, 할머니께 여쭤보았던 적이 있다. 왜 떡집에서 뜬금없이 커피를 팔기로 했냐고. 할머니의 대답은 심플했다. 시대에 맞춰서,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80이 되던 해에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나란히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그녀가 했던 모든 것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만 하는 일들은 아니었다.



 떡의 레시피를 매일 기억하며 치매를 예방하고, 만들어진 떡을 가판대 위에 이리저리 옮기며 한 번 더 몸을 움직이고, 손님들을 응대하는 김에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먹고살아야 하는 김에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하고. 그 모든 것은 오래도록 현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감각이었다. 젊은 사람들의 꿈이 스타벅스가 딸린 건물주가 되는 것이라고 하던데 나는 돈이 돈을 만드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다 오래도록 현장을 뛰어다니는 감독이 되고 싶다. 이왕 먹고 살아가야 한다면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김에 다양한 사람들과 깊이 대화하고, 촬영을 해야 하는 김에 낯선 곳에 용감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동시대의 감각을 유지해야 하는 김에 훨씬 더 어린 친구들에게 영상에 대해 배우고 싶다. 이왕 나이를 먹어야 한다면, 그렇게 치매를 예방하고 싶다.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이 동네와 가장 닮은 할머니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 집 앞에 자리한 그 가게의 떡과 팥빙수를 나눠먹고 싶었다. 상대방의 말보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좋아하던 아빠도 할머니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엄마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오래도록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유우 빙수 한 그릇과 콩떡 한 접시를 모두 비워냈다. 



작가의 이전글 도피, 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