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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설게하기 Mar 29. 2022

아주 긴 산책

목포를 떠나 다시 경기도로

6개월 동안 잠시 머리만 식히고 돌아오려 했던 목포의 생활이 어느덧 2년을 채웠고 

자연스럽게 여기에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곳을 떠난다. 


이곳에 오기 전, 꼭 이루고 싶은 목표 몇 개를 수첩에 적어 두었다. 

1.장편 시나리오 탈고 2.에세이 책 출간 2.운전면허 따기 2.수영


이 중에 이룬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장편 시나리오는 여전히 출구를 못 찾고 있고 50꼭지의 글을 다 썼지만 출판사가 망해버렸다. (하지만 순전히 출판사의 권유로 쓴 책이라 이미 쓴 원고에 대한 출간에 대해 딱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자유형은 여전히 못하지만 이상하게 배영은 할 수 있게 되었고 운전면허는 필기만 딴 상태이다. 


수첩에 적지 않았던 일들이 더 많았다. 달리기에 재미를 들인 것, 계절마다 친구들과 떠났던 여행과 함께 주고받았던 별빛 같은 대화들, 루미큐브 첫 1승, 몇 개의 레시피, 음원을 낸 것, 믿음직스러운 몇 명의 새로운 친구들, (내 기준) 아주 많은 책과 영화를 본 것, 아빠와의 화해. 등등...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나는 정말 이곳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는 식물 같았다. 









대가는 있었다. 2년에 비해 나는 커리어적으로 많이 퇴보했고, 심지어 커리어 전환를 꿈꾸는 극영화라는 영역은 0부터 다시 시작 해야만 한다. 예전에 나를 소개할 때 "안녕하세요. ㅇㅇㅇ을 만든 김송미 입니다." 하는 수식어로 나를 자신 있고 간단하게 설명하곤 했는데, 이제 누군가 나에 대해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흠... ^^a 글쎄요..." 머뭇거리며 설명을 포기하는 대신 상대방이 나를 제멋대로 알아갈 수 있게 시간을 두려고 하는 쪽을 택할 것 같다. 





우리 집 앞에는 마트고라는 슈퍼마켓이 있다. 목포에서 내가 돈 제일 많이 쓴 곳. 참새 방앗간 들리듯 들린 곳. 달리기를 마치면 포도 스티커처럼 늘 슈퍼 앞에 있는 오목거울에 인증 사진을 찍곤 했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사장님은 늘 한결같은 미소로 나에게 일상적인 안부나 인사를 건네주시곤 하셨다. 그게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에 부는 선선한 바람 같았고, 어딘가에서 상큼한 오렌지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딸기 박스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고, 아침에 배달 온 유제품을 냉장고에 진열하는 사장님을 보며 힌트를 얻는다. 좋아하는 책 속의 밑줄 친 문장 하나. 

딱히 즐겁지 않은 일들을 딱히 즐겁게. 


2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가는 행보가 너무나 뻔하다. 돌에 붙은 자연산 조개처럼, 어딘가에 딱 붙어 있는 지루하고 안정감 있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 슬슬 나의 역마살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아마 나는 또 떠나겠지. 


돌아가면 반쯤 따둔 운전면허를 완전히 따고, 시민회관에 예약한 수영 대기번호가 내 차례가 되길 기다리며 직장인 친구들 만큼의 강도와 지루함을 견디며 내 일을 하겠지. 딱히 즐겁지 않지만 딱히 즐겁게. 

그러고 보니 떠나기 전에 언니한테 선심쓰듯 준 커피머신은 아무래도 다시 뺏어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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