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산책을 다녀왔다. 작년 이 시간때 쯤엔 아마 유달산 둘레길을 산책하고 있었겠지. 그동안 해외 국내를 가리지 않고, 내가 머물렀던 곳들의 동선을 지도에 표시한다면 선의 모양이 꽤나 다이나믹하겠지만 사실 어디에 있던 대체적으로 늘 비슷한 모양으로 지내온 것 같다.
사는 곳 근처에 맘에 드는 카페 두세 개쯤 알아두기. 파스타와 맥주가 맛있는 식당 역시 두세 개쯤 알아두기. 그리고 그곳에서 영상 편집하거나 글쓰기. 공공 도서관 찾기. 화실에서 수첩 하나를 사서, 떠오른 생각들 모조리 적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루틴은 가급적 매일 산책하기.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걸, 가급적 저곳에서도 하는 판에 박힌 생활습관.
얼마 전에 부산에 있는 친구 작업실에서 2주간 합숙을 했었다. 그 2주간에도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근처 공원을 뛰거나 돌았다.
첫째 날,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성분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5바퀴째 그녀를 마주치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팀워크 같은 게 생겨버려서 숨이 차 그만 달릴까? 싶었지만 멈추지 않고 달리는 그분을 보며 10바퀴를 채웠다.
둘째 날 같은 시간에 공원을 나와 그분부터 눈으로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10바퀴를 달리는 동안 그 기도가 끝나지 않았다. 문득 그 할아버지의 기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달리기가 막 끝나갈 때즘, 어제 만났던 여성분이 공원에 들어와 달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분이 달리는 타이밍에 맞춰 한 바퀴를 더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넷 째 날 그분이 먼저 달리기를 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도 같은 벤치에 앉아 간절하게 무언가를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오늘은 나이가 많아봤자 중1쯤 되어 보이는 왜소한 소년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뒤집는 묘기를 하기 위해 몇 번이고 바닥에 미끄려졌다. 그 애가 너무 많이 넘어져 내 꼬리뼈가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이후로 소년을 격일에 한 번씩 마주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랜덤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다. 술에 취한 채, 늘 이른 아침에 퇴근하던 부채만한 속눈썹을 달고 있던 여자. 벽돌보다 더 높은 하이힐을 신고 휘청휘청 걸을 때마다 가느다란 발목이 톡 하고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아 인상이 깊게 남았다.
2주간, 할아버지는 가급적 매일 나와 기도를 드렸고 소년은 격일로 나와 스케이드보드를 연습하고 달리기를 하는 여자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나오거나 늦게 나왔고 나는 하루를 빼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달렸다.
마지막 산책. 여느 때와 같이 운동복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누군가 공원 진입로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부채 같은 속눈썹이 반쯤은 덜렁거린 채로 울고 있었다. 그 여자다. 저 멀리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번호를 누르지 않은 전화기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엉엉엉....너무 아파요. 너무너무 아파요.
북적이던 출근길,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 옆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나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고 다짐하며, 냉정한 마음으로 그녀를 뒤로하고 공원을 달리....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그녀에게도 달려갔다.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엉엉엉 너무 아파요. 너무너무 아파요
그녀의 몸엔 여기저기에 상처와 멍이 참 많았다. 어느 순간 멍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 작은 멍들은 타인이 만든 멍이라기 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기저기에 부딪치며 생긴 멍일 확률이 높았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근처에서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는 그녀를 부축해 벤치에 앉혔다.
술 취하셨어요?
네....저 술 취했어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물이라도 드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녀는 숨을 막 헐떡이며 울었다. 화장이 얼굴 전체에 수체화 물감처럼 번져갔다.
아아....죄송합니다. 이제 가셔도 돼요. 진짜 가셔도 돼요
그녀를 벤치에 앉힌 후, 공원을 향해 걸으면서도 약 5번쯤 고개를 돌려 망설이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자마자 후회했다. 아, 그래도 까진 무릎에 밴드라도 붙여주고 올 걸....
오늘은 함께 달리던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할아버지도 없는 공원에서 마지막 러닝이라니 왠지 기운이 빠져 초점 없는 눈으로 달렸다.
드르륵 탁 !
8바뀌 정도를 달렸을 때쯤 바퀴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우렁찬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스케이트가 정확히 360도를 회전해 두 발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우악...!읍.
양 팔을 하늘 위로 높이 올리고 조용히 자축하는 소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달리기하는 여자와 할아버지와 몸에 멍이 많이 든 아까 그 여자와 함께 보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10바퀴를 다 채우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려는데, 공원 진입로에 부산연등축제 때 사람들이 써 놓은 소원 문구가 공원 나무에 걸려 있었다.
공원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기도는 이루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