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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으로 못 버티는 날도 있다

혼자 걷는 사람들을 위한 다큐 노트

by 낯설게하기

나답게 살아간다는 게 뭘까? CHAT GPT에게 물어보았다.


남의 시선이나 사회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와 감정에 귀 기울이는 삶


그런 나다움의 대명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B가 떠오른다. 그녀는 가슴이 뛰는 단 하나의 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고 서로의 이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와 사랑에 빠져 자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있는데 심지어 그걸 SNS에 자랑하지도 않는다. 내가 늘 판타지로만 품고 있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


그 친구와 주기적으로 영상 통화를 하며 서로의 삶을 돌아보곤 한다.

“요즘 어때?” 내가 근황을 묻자 그녀가 말했다.

“오늘 집 문을 활짝 열고, 애인이랑 점심 차려 먹었는데,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더라. 그제야 계절이 바뀌었구나를 체감하고, 와~ 좋다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했어.”


반면 오늘 내 하루는 매연가스와 콘크리트 건물이 빼곡한 곳에 자리한 집에서 하루 종일 갇혀 컴퓨터와 씨름하며 가을이 온 줄도 몰랐고, 저녁엔 표현이 서툰 남편에게 서운함이 쌓여 심하게 다투기까지 했으니 B의 근황은 더욱 꿈결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B와 B의 애인이 운명처럼 만났다면 나는 어땠을까. 남편과 나는 좋게 말하면 자기밖에 모를 만큼 개성이 강했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모나서 오래도록 혼자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둘이 주선자조차 큰 기대 없었던 소개팅에서 우연히 만났다. 우리는 나는 솔로의 도시락 데이트처럼 어색하고 서툰 과정을 거쳤고 이혼숙려캠프 같은 전쟁을 몇 번 치렀다. 결국 서로의 밑바닥까지 확인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레 결혼을 결심했다.


B에게 말했다. “네 하루가 너다움으로 꽉 차 있는데, 그 상황 하나하나가 나에겐 큰 용기를 필요로 해. 일단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시골에서 집 짓고 살아야 하는데 생계도 걱정이고 그러려면 남편도 설득해야 하고 블라블라 와 같은 자질구레한 말들. B가 이어 말했다. “근데 웃긴 게 사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나와 다르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야. 내 마음의 추가 자꾸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로 돌아가 혼란스러워.”

그녀가 인생에서 드물게 타인의 ‘눈치’를 보는 순간을 맞이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제일 친한 친구에게 그걸 말했다? 그러니까 걔가 <너는 눈치를 좀 봐도 돼. 그동안 너무 안 보고 살아서 남들한테 너도 피해 많이 주면서 살았을걸?> 그러더라. 솔직히 맞는 말 같아서 요즘엔 나랑 다른 사람들이랑도 더 가까워지려 노력해 보려고”

과연 B의 절친이 맞다고 생각했고 허허 웃으며 그걸 수용하는 B가 한층 더 비범하게 느껴졌다.


B와의 연락을 끊고 생각했다. SNS에 도배된 ‘나다움’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래, 생각해 보니 비록 지금은 누구보다 타인들의 기준에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지만 3년 전엔 무작정 시골로 내려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매일 건강한 것만 먹고, 매일 명상하고 운동하고, '존재의 의미' 같은 것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면 소모적인 그 어떤 작업 의뢰도 받지 않았다. 그 덕에 생에 가장 적은 수입을 경험했지만, 나는 건강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무능해졌다.


돈이 떨어져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쿠팡·김밥·브런치 알바를 전전하다 지금은 다행히 전업 영상 프리랜서로 다시 돌아왔다. 목포 원도심에서 보낸 일 년 반은 생각보다 큰 흔적을 남겼다. 전에는 제작비가 몇 백만 원이면 “죄송합니다” 하며 일감을 거절했지만, 지금은 12년의 경력을 역행하는 제작비에도 감사합니다 하며 일을 하고 있다. 올해 했던 작업만 떠올려봐도, 연예인 왓츠인마이백 영상, 학습지 홍보 영상, 고춧가루 홍보 영상 등 각종 영상들을 편집했는데 그것들이 ‘존재의 의미’라는 관련 없어 보이지만 월세와 식비가 되어 나를 살아가게 해 준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회 속 사람들과 다시 섞이며 나는 수없이 나다움을 꺾어야 했다. 일이란 수많은 사람의 상식과 내 상식이 합쳐지는 과정이니까.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도 자신의 기준이 중요한 것뿐이었다.


무균실 같은 시골 생활을 끝내고, 세균투성이 도시 속에서 나는 다시 아프고 현기증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으려 했다. 이런 일본 드라마 제목이 떠오른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도망가는 건 진짜 도움이 되긴 한다. 몇 년 전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 온전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진 못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허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만한 대가도 반드시 따른다.


내가 도망치기 전, 직업적 전성기 시절에 같이 달렸던 친구들 중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을 자랑하거나 기어이 꿈을 이뤄냈다. 그러니까 자신이 되고 싶은 어른이 기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한 명도 빠짐없이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물론 내 주변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 일 수도 있겠지만.

그중 가장 성공한 친구 A는 자기다움을 양보한 대가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 돈으로 산 비싼 가구들로 꾸민 자기만의 공간에 나를 초대해 그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내가 쓸모 없어지면,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 일하는 관계 외에는 누구도 나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이 많은 돈 벌어서 무슨 소용이야” 하며 막 쿠팡 알바를 끝내고 온 나를 붙잡고 엉엉 울곤 했다. 왜 늘 위로해 주는 쪽은 나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솔직한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그들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내 핸드폰에는 온통 “송미야 오늘 놀래? 산책 갈래? 은중과 상연 봤냐? 커피 마실래?” 하며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연락만 가득해서, 어째서 나를 쓸모에 의해 찾아주는 사람들의 연락이 슬픈 건지 살짝 이해하긴 어렵지만 일단은 그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만다. 사실 위로를 해주면서도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이상하게 스티브 잡스가 생각난다. 자기답게 살면서 돈도 왕창 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사람의 상징. 그런 사람은 또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내 주변에 스티브 잡스는 없지만 그와 비슷한 유형의 유명 인사를 영싱 일로 만난 적이 있다. 자기다움 메시지로 책도 내고, 유튜브를 가득 채우며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S. 쿨하고 힙한 그에게 질문을 건넬 인터뷰어 Q도 섭외했다. 그는 S와 동종업계였지만, 이미 누군가가 말한 것 같은 메시지와 형식을 따라 하는 동시에, 유명해지고 싶어 타인의 반응을 많이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기다움이 덜한 탓인지 Q는 S보다 출연료가 낮았다. 카메라가 켜지자 S는 작두를 탄 것처럼 명언을 쏟아냈다. 과연 저게 비범한 사람의 능력인가!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되는 가운데, 갑자기 그가 촬영을 중단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약서에 서명한 총 촬영 시간 중 아직 20분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는 자신은 시간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장소를 이동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사실 이미 우리 모두 그의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현장에 있는 스탭들 임금을 다 합친 것보다 그의 시급을 높게 책정했는데, 그 사실을 그는 간과한 걸까?


어쨌든 남겨진 Q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현장의 공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S보다는 덜 통찰력 있는 뭉뚝한 말들로 그가 못 채운 분량까지 인터뷰를 차분히 마무리했다. Q는 스탭들을 위로했고, “다음에도 또 불러주세요”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건네고 명함도 건넸다.그리고 그 평함을 평소와 다르게 잘 받아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갑자기 S가 헐레벌떡 촬영장에 다시 뛰어들어왔다. “아까 제가 못 찍은 분량 있지 않나요? 지금 찍으시죠!” 하고 나를 재촉했다. 이미 카메라는 철수된 상태였고, 그는 촬영을 배려해 다시 온 것 같았지만… 사실 그가 돌아온 진짜 이유는, 자신이 아끼는 명품 목도리를 이곳에 놓고 갔기 때문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어쩌죠 카메라가 다 철수되었는데” 라고 답하자, S는 갑자기 생뚱 맞는 소리를 이어갔다.

“그래요? PD님 그러면 저도 이왕 여기 왔고, 시간도 많은데 저에게 궁금한 거 있으시면 다 물어보세요. 사실 저는 인생의 모든 문제에 거의 다 답변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명언을 쏟아내느라 내 퇴근 시간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큼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자기다움의 아이콘에서 사회성이 지나치게 결여된 사람으로 전락하던 순간이었다.

순간 S와 같은 사람만 가득한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그만 현기증이 났다. 나는 그에게 사인 받으려고 했던 책을 가방에 꽁꽁 숨기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퇴근길에 S와 Q를 동시에 떠올리며 어쩌면 내 추구미가 '자기다움'보다 ‘우리다움’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기다움에는 자신밖에 없지만 우리다움엔 내가 포함된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닌 만큼, 타인 역시 그러하고 동시에 내가 대체될 수 없듯, 타인도 자신의 인생이 제일 귀하다. 그 두 개의 진실이 세상에는 공존한다.


사실 오늘 나에겐 우리다움에 대한 숙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어제 나는 우리를 위해 저녁을 만들었고, 남편은 자신의 핸드폰만 보고 앉아 있었다. 이기적인 그에게 화가나 고래고래 소리쳤었고,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내 시간과 마음을 쏟은 게 억울했다. 우리다움은 개뿔.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갔다.


다음날, 점심을 차려 먹은 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는데 쓰레기가 싹 버려져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플라스틱을 버리러 베란다에 나가보니 재활용 쓰레기도 싹 버려져있었다. 절대 먼저 연락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카톡을 켜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꽃 한 송이 사 와 줘. 그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어제는 나답게 화냈지만

오늘은 우리답게 부탁했다.


남편은 내가 일하는 카페로 찾아와,

치킨과 함께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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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5B28j886niM?si=vnAHfIuXNGa_m9Z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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