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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의 밤

by 낯설게하기

남편에게서 온 카톡 "나 저녁 먹고 들어와"

방금 쌀 씻고, 밥을 지었는데… 반찬거릴 찾으려고 찬장을 열었다가 소면이 보였다. 갑자기 잔치국수가 확 땡겼다. 뭐, 밥은 내일 먹으면 되니까. 양파, 호박, 당근을 채 썰어 육수를 내고 뚝딱 잔치국수를 만들었다. 국물을 들이키자 지난 이틀간 촬영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녹는 느낌이었다. 국수를 먹으며 홍진경 언니의 유튜브 영상을 클릭했다. 이혼 후 4개월 만에 복귀한 영상이었다. 유튜브 팀과 활기찬 낮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진경 언니. 일이 없는 시간엔 그 빈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그게 가장 어렵다고 했다. 잠시 후, 그녀는 화장대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황인찬 시인의 「무화과 숲」을 읽어주었다.


쌀을 씼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그 시를 읽는 진경 언니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쓸쓸했다.
자신만의 취향으로 가득한 커다란 집에 홀로 남겨진 그녀를 보자
몇 년 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한테 보여지는 자동차, 옷, 액세서리 이런 것보다도
내가 늘 베고 자는 베개의 면, 맨날 마시는 컵의 디자인같이
매일의 일상을 귀하게 채워가다 보면요. 절대 우스운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내가 나를 아끼지 못할 때마다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

오늘 오전에도 그 말이 생각나 샤워 후 바디 로션을 꼼꼼히 발랐다. 며칠간 카메라를 메고 있느라 단단히 뭉친 어깨에도, 하루 종일 웃으며 인터뷰하느라 욱신거렸던 관자놀이에도, 계속 뛰어다니느라 부은 종아리에도.


어제는 남편이 지방 출장에서 돌아온 나를 마중 나왔었다. 세 개의 가방 중 두 개를 들어주었다. 각자의 세상에서 완전히 지쳐버린 두 사람은 메마른 얼굴로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오늘 식탁 위엔 잔치국수 소면 몇 가닥이 붙은 빈 그릇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함께 있어도, 여전히 혼자 남겨지는 시간들이 있다.

그건 도려낼 수 없는 공백 같은 것.


그 공백 속에서 쌀을 씻고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 아침을 먹었다.


오늘 밤엔 눈을 감고

사랑해서 차마 혼낼 수 없는 꿈을 꾸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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