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빠진 자의 잡설
2023. 12. 12.
얼마 전 담낭제거수술을 받았다. 지속되는 옆구리 불편감으로 인한 내과 진료에서 의사선생님은 초음파 검사를 권유하셨고, 그것을 통해 직경 2.9㎝의 담석이 담낭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담낭은 간에서 나온 소화액을 저장하는 주머니로 쓸개라고도 한다. 크지도 않은 그 주머니에 거의 3㎝에 가까운 돌이 있으니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무튼 이제 나는 쓸개 빠진 놈이 되었다. 이제는 공포영화를 봐도 간담이 서늘할 일은 없다. 간만 서늘하겠지. 게다가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담대할 수 없다. 담이 아예 없는데 담이 커질 일이 있으랴... 하지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지조 없는 사람은 안 될 것 같다. 붙을 쓸개가 없으니 이제는 오직 간에 붙을 뿐이다. 썰렁한 말장난은 각설하고.
지금까지는 그 이름도 생소한 담낭이 내 뱃속에 들어있었는지도 잘 몰랐었는데,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나는 그 존재감을 느낀다. 일단 수술 직후의 일시적 증상이라고 하지만 위에 부담 없는 저자극·저지방의 죽을 먹었음에도 심하게 요동치는 내 배, 그리고 예상치 못한 성급한 배변 활동이 그것이다. 이전에 담낭은 간에서 생산된 소화액을 받아서 잘 저장해 두었다가 음식이 위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소화액을 공급하여 원활한 소화를 도왔을 것이다. 이제는 그 역할을 간이 직접 담당하겠지만 아직 변경된 내 장기의 소화 시스템이 완벽히 활성화되지 않은 현시점에서의 소화 상태는 담낭의 존재와 역할을 나에게 상기시켜준다.
소화의 기능만큼이나 담낭의 부재를 인식시켜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했던 공간이다. 수술 직후 누군가의 수기처럼 ‘뱃속에 믹서기를 집어넣어 돌린’ 것 같기도 하고, 마이크 타이슨이 뾰족하게 꿀밤 주먹을 쥐고 내 명치에 어퍼컷을 날린 것 같기도 한 극심한 고통을 마약성 진통제로 달랜 후 나를 2박3일 동안 괴롭힌 것은 ‘돌아누울 때의 고통’이었다. 하늘만 바라보고 열댓 시간 누워 있어 보면 알 수 있는 허리의 아픔 때문에 옆으로 살짝 돌아누울 때 나는 내 뱃속의 모는 장기들이 중력 방향으로 급격히 쏠리는 충격적인 고통과 함께 공포감을 느꼈다. ‘이것은 분명 비어버린 담낭의 공간으로 다른 장기들이 비집고 들어오는 현상일 것이다. 복대를 단단히 하고 있으라는 이유 또한 그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믿은 나는 남은 입원기간 동안 꼼짝없이 차렷 자세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복강경 수술시 시야 확보를 위해 배를 부풀리느라 주입했던 이산화탄소가 남아서 꾸르륵거리는 거라고 말씀해주셔서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돌아누울 때마다 담낭이 있던 공간에 다른 무엇이 밀고 들어와 내 뱃속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쓸개의 부재’로 인해 다시금 인식하게 된 존재감 - '부재의 존재감'이 갖는 원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 은 말이 가지는 ‘위로와 격려의 힘’이다. 사실 수술 1주 전 한 모임에서 수술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걱정의 말씀을 해 주시는 분에게 ‘괜찮다, 요즘 복강경으로 해서 간단하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답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아니에요, 그거 엄~청 아프데요’라는 말을 했고, 이후 나는 고통에 대한 공포에 직면했다. 누군들 정보를 검색해 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실제로 내 귀에 들린 그 말은 실체 없던 공포가 구체화되는 주문이었고, 수술 전 1주일은 공포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술대에 올라 마취제가 들어가는 순간에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 역시 ‘이제 곧 엄청나게 아플 텐데’라는 고통에 대한 공포였다.
물론 전술한 것처럼 상당히 아팠다. 아직도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포로 인해 극대화된 나의 고통보다 강한 것은 바로 ‘위로와 격려’였다. 지인과의 통화.
지인 1: “수술 잘 마치셨어요? 아프시죠?”
나: “(최대한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괜찮아요, 진통제 먹고 시간 좀 지나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지인 1: “아이고, 말은 그렇게 하셔도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나: “없어요^^. 너무 감사해요. 걱정마세요.”
지인 1: “아프시겠지만, 그리고 힘이 하나도 안 나겠지만 힘내세요.”
나는 정말로 큰 힘이 났다.
두 번째 지인과의 통화.
지인 2: “고생 많으시죠? 얼마나 힘드세요.”
나: “(역시 최대한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괜찮아요, 그리고 요즘 복강경 기술이 좋아서 수술도 간단히 끝냈어요.”
지인 2: “아니에요, 복강경이 더 아픈 거예요. 얼마나 아프셨을까? 푹 쉬시고 힘내세요.”
-중략 -
이 외에도 많은 분 들이 격려와 위로로 나와 내 가족에게 힘을 주셨다. 실체가 없는 말이지만 그 한마디가 때로는 공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한다. 담낭의 부재로 인해 나는 말의 힘이 가진 존재감, 특히 위로와 격려의 힘이 얼마나 큰 존재감을 갖고 있는지를 몸소 체감했다. 담낭의 부재로 인해 말이 가지는 힘의 존재감을 다시금 체감하고, 나 역시 어떠한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교훈을 얻은 계기가 되었다면 나름 괜찮은 결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