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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땅별 Feb 14. 2024

인간관계에 관한 고찰


제가 살아온 나날을 갈무리해 봅니다. 그중 몇 개의 괴로웠던 기억을 모아 습작하면, 팔 할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괴로움이었습니다. 먹고사니즘처럼 진로·진학·취업 등에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고민이 도처에 산발적으로 있음에도 말입니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타인을 발견합니다. 요람에서부터 어머니를 보았으며, 옆에 있는 아버지를 마주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친구를 사귀었고, 선생님을 대면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선 타인과 공적 관계를 형성하고는 합니다. 또 우리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상급 병원 병상에서 타인들에게 둘러싸여 죽길 바라며, 장례식장에서 근조 화환이 가득한 경관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태어났다는 건 관계에서 비롯된 타인의 시선을 매 순간 직면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 목을 조이곤 합니다. '관계'에서 비롯되는 희망과 절망을 한 번쯤 느껴봤을 겁니다. 우리는 사람 덕분에 살고, 사람 때문에 죽습니다. 누군가 내게 전한 말 한마디가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줍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내게 보인 무관심한 태도와 아무런 의도 없이 내뱉은 말이 우리를 눈치 보게 만들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는 타인의 시선이 두렵습니다. 저의 정체성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원치 않은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고, 저의 특별한 자의식이 유별남으로 취급된 경우가 있었기에 그러하며, 타인의 무관심·냉소가 제 주변을 계속 맴도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다만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의 존재가 유기되었던 경험은 한 번쯤은 다들 있으실 겁니다.


저는 가혹한 타인의 삶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청소년기 시절 저는 제 자아를 타인에게 의탁하며 역설적으로 안정을 누리고자 했으며, 성인 시절에는 타인 대신 나만이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그러나 차마 감당은 못 하는 고독을 끌어안고 운 적도 많습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온갖 의성어를 끌어모아 자간을 가득 채워도 부족할 정도로 말이지요.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저를 비관했으며, 때론 아무도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에 모든 이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게 제 안의 상처를 보듬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습니다.


다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 경험이 저에게만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도와 민감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상처를 입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상처가 발생했을까요? 가혹한 삶이 일어나고, '나'의 존재가 유기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타인과 투명해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처음 만난 사이건, 연인과의 관계건 말이죠.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 정착하고, 내가 느끼기엔 지극히 객관적-사실은 주관에 불과하지만 말이죠-인 타인을 도출해 냅니다. 사실 나를 포함한 타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활동성이 있는 존재임에도 말입니다. 어제의 우리가 다르고 오늘의 우리가 다르며, 내일의 우리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엉성하게 얽힌 타인의 모습만을 보고 함부로 '그'를 정의합니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속단에 포박당하며 (언제나) 진실과는 먼 타인의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타인의 선고. 바로 이 선고가 우리의 삶을 유기되게 합니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나로 살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는 그러기에 필사적으로 변론을 펼칩니다. 나의 삶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배열되지 않도록, 나의 정체성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문득 깨닫게 됩니다. 타인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이 재판장에선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판장의 구도는 나를 내려다보는 위치로 형성되어 있으며, 재판장과 배심원은 조소하며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우리의 절박함은 이내 조롱이 됩니다. 마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재판받는 기분입니다.


저는 소망했습니다. 제 진심을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기를 말이죠. 제 진심을 아는 이가 나타나 저의 고유한 ‘진실’에 도달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몇십 년을 그렇게 소망했지만 바뀐 건 별로 없었습니다. 타인은 결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돌아보면 어쩌면 저조차도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든 진실은 감정 과잉이었고, 혼돈이었습니다. 저의 진실은 단지 치기였을지도 모릅니다. 해방감을 누리고자 타인을 난도질했던 치기.


또한 저도 타인을 볼 때 저만의 오만과 아집에 빠진 적이 많았습니다. 타인을 제 식대로 받아들이면서, 속단했던 순간이 헤아릴 수 없었죠.


그러니 우리 이제 그만 판단하고, 그만 아파합시다. 그저 지긋이 타인을 바라보기만 합시다. 슬픔을 겪은 사람에게는 타인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더듬이가 생긴다고 합니다. 타인의 슬픈 표정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고, 슬픔의 몸짓과 언사를 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는 더듬이 말입니다. 이러한 더듬이를 가진 사람에게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합니다. 슬픔은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게 합니다. 타인을 판정하고 속단하기보단 판단을 멈추고 타인의 행복을 소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애써 타인을 위해 자신을 변론하진 말아요. 다만 타인의 아픔을 그저 말없이 공감해 주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요? 온전히 슬퍼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다림 말입니다. 그 기다림은 타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소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글의 끝에서 저는 소망합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따스했기를. 혹여 슬픔이 가득했더라도 당신을 그저 응원하겠습니다.


*김멜라 제꿈꾸세요 및 전소영 그리고 웃어주세요(제꿈꾸세요 작품론) 참고 및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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