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정치 담론은 무엇인가
최근 언론은 미국 공화당 유력 대선 후보인 트럼프가 한 폭탄 발언을 비판했다. 선거 유세 중 "방위금을 부담하지 않을 시 미국은 나토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문제였다. 그 말은 냉전 이후 설립된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가치를 부정하고 러시아를 독려하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들렸다. 비판은 미국 내·외부를 막론했다.
사실 트럼프 당선부터 의회 습격, 재판까지 지난 8년간 트럼프에 대한 비판은 차고 넘쳤다.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그에 대해 비판뿐 아니라 비난과 질시, 욕설을 퍼붓는 지식인들도 즐비했다. 그러나 그런 야만적 인물이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며, 왜 지지자들은 광적으로 그에게 열광할 수 있는지, 지지도는 그토록 굳건한지를 묻는 불편한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했다.
2016년 트럼프의 당선에는 비대졸자의 영향이 컸다. 트럼프는 비대졸자 표 3분의 2를 얻었지만 힐러리는 고등교육 이수자에게서만 압승했다. 힐러리는 2018년 뭄바이에 열린 컨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낙관적이고, 다양하고,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고장에서 이겼습니다. 반면 트럼프는 흑인의 권리를 못마땅해하고 여성들이 일터에 나가지 않는 고장에서 이겼죠." 한마디로 트럼프는 (힐러리가 볼 땐) 사회에 불평만 하는 ‘루저’들로 이겼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루저와 위너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그 기준으로 '능력주의'를 제시했다. 샌델이 얘기하는 능력주의는 각자가 능력에 따라 성취를 달성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차등적으로 분배받는 개념이다. 그는 능력주의를 기여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는 공산주의나, 선천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연고주의보다 생산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생산성은 능력주의를 민주주의·자본주의와 더불어 오늘날 주요한 사회 체계로 채택시킨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단점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실는다는 것이다. 초라한 능력을 보이거나 형편없는 성취를 달성하면 그는 패배자다. 패배자의 삶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못난 놈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비극은 민주주의와 결합해 포퓰리즘을 양성한다. 트럼프는 엘리트 고액 자산가이지만 패배자들을 위로해 줬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에서 능력주의로 상처받았던 미국 시민들은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트럼프가 사회 신뢰를 무너트리고, 질서를 깨트려도 괜찮다. 마음에 깊이 박혀있던 아픔과 상처를 트럼프가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지식인들은 트럼프를 그저 포퓰리스트·극우 정치인으로만 바라본 채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진단은 텅 비어버린 정치 공론장을 다시 활성화하고, 지식인부터 시민들까지 상호 배려하는 정치 담론을 만드는 것이다. 오만에 빠져 타인을 루저라고 오판하면서 사회적 연대를 해치는 발언을 금해야 하며, 친환경·노인·이민자·소수자·여성 인권 등을 논의할 때 그것이 국민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타인의 분노를 터부시 하거나, (뭘 모르는 이들의) 반격-백래시-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
친환경·노인·이민자·소수자·여성 인권이 나아지는 환경으로 가야 하는 건 국민 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것이 합당한 방향이라고 믿는다.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다시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정치적 담론을 이끌 때마다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부합하도록,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