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땅별 Feb 16. 2024

구원을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자세

기독교를 믿는 이에게 ‘구원’은 기쁨이자 소망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감정은 나약해지기 마련인데, 기독교인은 구원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불안감을 야기한다.


예컨대 이런 질문이다. ‘나는 신의 은총을 받아 구원을 얻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구원을 받은 게 맞는가?’ 질문에 얽매일수록 두려움은 커간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의 거두들은 명징한 해법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루터·칼뱅 등은 구원을 예정론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칼뱅은 구원에 대해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이뤄지며, 선험적으로 확정된 구원을 개인의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삶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았는지, 정죄받았는지는 현세에서 찾을 수 없다. 신자는 그저 신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다.


준엄한 명령으로 다가오는 칼뱅의 예정론은 기독교인에게 삶의 원칙을 제시했다. 다만 정서적 긴장과 압박감도 주었다. 만약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간절히 바라는 신도라면, 자신이 죽고 맞이할 내세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관해 절박한 의문이 들 것이다. 이에 칼뱅을 따르는 칼뱅주의자들은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일종의 직업윤리를 탄생시켰다. 우리가 사회학과에 다니면 배우는 ‘소명의식(Calling)’이다.


"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소명(부름·Calling)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직업'에 충실히 임하라. 금욕하고 근면하라." 이러한 삶을 사는 이는 구원의 ‘징표’를 얻은 것이다. 묵묵히 힘들게 일한 삶.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되진 않으나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징표'다.


금욕과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하는 칼뱅주의의 직업윤리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를 축적시키는 동인이 됐다. 다만 근면한 행동을 구원의 '징표'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해석하는 관점으로 변모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이 무언가에 간절히 임했다면, 그 행동이 구원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심리를 버리기 힘들다. 이러한 심리를 따르면 자신의 선행·노동·자세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구원의 '징표'가 아닌, 구원의 '조건'이자 '수단'이 된다.


이는 오만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성실한 행동이 곧 구원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교회출석·기도·회개·봉사 등 교회 예식에서 누가 더 성실히 임했는가로 구원의 여부를 가리며, 자신보다 덜 성실하고 초라한 믿음을 가진 이를 볼 때마다 내면에서 우월감이 피어난다.


이러한 우월감은 초기 기독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도, 교회 개혁의 선봉자인 마르틴 루터도 거부하고 배격한 감정이었다. 오직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은총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한다는 격언을 무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타인을 동정할 때도 우리 모두가 약하고 부족한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게 아닌, 본인의 우월감으로 타인을 정죄하듯이 동정하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는 안타깝게도 번영신앙의 성격을 보인다. 통성기도를 할 때 누가 더 소리가 큰 지부터 시작해, 회개기도를 할 때 누가 더 눈물을 많이 흘리는지 등을 고려한다. 본인의 성공을 바라는 기복신앙도 만연하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번영이 구원의 단서인가? 또 고난은 죄의 단서인가?


구약 성서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욥기는 신의 질서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겪는 욥에게 "죄 없이 벌 받는 자가 누구냐(욥기 4:7)"라며 욥을 조소했다. 결국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던 욥조차도 확신을 잃은 채 신을 원망했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나 욥기 후반에서 신은 신만이 아는 우주적 질서를 욥에게 보이며 욥을 용서한다. 종종 욥기는 신의 무자비함과 잔혹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다만 욥기를 읽으면 악과 고통, 부조리를 넘는 신만이 아는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욥기를 읽으며 인간 중심의 능력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신 앞에서 겸손함을 되찾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트럼프 "NATO 탈퇴" 충격 발언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